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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1월 15, 2004

하나님의 사랑하심은 우리의 판단에 국한되어지지 않아요..

[위로/격려] 하나님..

당신은 지금 저를 바라보고 계시겠지요?
혼자 너무 외롭다고,,이 세상에 온전히 혼자라고..
울고 있는 저의 눈물을 닦아주고 계신가요?
당신이 지으신 이 세상과 사람은...제겐 상처로만 남습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면 행복해질텐데..
어떻게 주님께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너무나도 멀어보입니다.
하나님..저를 사랑해주세요..외롭지 않게 안아주세요


[답변] 하나님의 사랑하심은 우리의 판단에 국한되어지지 않아요..

글쓰신 님은 욥이라는 사람을 아시나요.. 성경에 나타나는 욥에 대하여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며 그 순전함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며 시험을 허락하신 것을 주목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라는 것이 자신에게 나타난다고 면박을 받으면서.. 결국 자신이 이러한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통으로 주신 것이라는 생각에 넘어지는 욥..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하심은 그러한 욥의 판단을 책망하시고 고통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기를 원하시고 또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처럼 혼자라고 생각되어지며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자신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은 의로운 욥이 잠시 넘어지는 모습 욥기서 29장이하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에 고통이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변함없으십니다. 그것을 고백하고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허락되어질 수 있다면 보일 수 있는 그러한 느낄 수 있는 그러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간구해보세요.. 그 앞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은 나의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으신 선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이 기초가 되어진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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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질문]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산다는 것은 뭘까?
산다는 것은...
난자와 정자의 결합으로 내가 생겨났고, 나는 10개월동안 어머니 자궁속에서 보낸 뒤 에 이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물론 내가 태어났을 당시를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정확하게 보고,듣고,냄새를 맡고,느끼고, 말을 한다는 것..은 3살 무렵이다
그 전에는 내가 살아도 산것이 아니였다. 나는 숨만 쉬는 인간이였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나의 환경에 반응을 하면서 그리고 내 자신을 느끼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몇십년이 지나면, 혹은 운이 안좋으면 몇년이 지나면
나는 이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죽는 것은 나의 의지대로 할 수 있을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정말 슬픈일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여서...
세상을 모르는 나는 다만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니다...모르겠다....

요즘에는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문득든다.
인생무상이라고... 인간은 자연앞에서 결국...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거 같다.
그냥 죽으면 모든 것이 그만인데...
금, 은, 보화...그런거 가져가지도 못하는데...
결국..흙으로 돌아갈 뿐인데...
혹자는 인생에 참 의미를 아직 모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나에게 있어 인생은....참다운 의미를 찾을 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나는 인생이 멋없고 따분하고 재미없고, 외로움의 연속이다.
그렇게 때문에...그다지 살아가고 싶은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기쁨도 슬픔이라는 감정에 지배당할 수 있고, 슬픔이라는 감정도 기쁨에 지배당할 수 있겠지만, 나의 마음속에는 슬픔이라는 세력이 더 큰거 같다.
인생을 기쁘게 살아가고 싶어도, 그것은 내 자신에 대한 가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살아가는 것은 정말 힘든것이다.
어른이 되면 인생이 더 재밌을 것 같았다...
아니다..어른이 한번 되어봐...그럼 어렸을 때가 훨씬 좋았다는 것을 알게 될거야...
그래서...어른들이 동화를 만드는 것인가..
인생은 결코 재미가 없기 때문에, 동화라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서
자기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을 해주는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문득 한다.
아...인생은 따분하다.
인생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면 사람들은 두가지의 신체적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하나는 밤에도 잠도 못자고 일명 불면증에 걸려서..허기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루종일 잠만 자는 것이다. 잠만 자면서,,,죽는 것을 꿈꾸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인생에 대한 따분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둘 중의 하나의 신체적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별하지도 않고, 별다른 재능도 없는 나...

이 세상에 왜 태어났을까???
산다는 것은...아무래도 죽을 때 까지 풀수없는 숙제일 것이다.


답변 Re: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러한 질문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어쩌면 가장 어려운 질문이 될 수 있고 또 어쩜 쓸데없다고도 생각될 수 있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쓸데없는 질문이라고 하는 판단이 가능한 것은 바쁜 세상에 답도 없다고 생각되는 것에 생각한다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은 앞서 말한대로 그러한 질문의 답변의 실제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의 기본적인 납득이 강요되어지는 현실적인 판단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한 것은 철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불가지적인 측면이라고 하는 즉 그 답변되어지는 것이 사실로서의 실제를 가지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이러한 때문에 어렵다는 것과 그것은 현실적이지 않는 가운데서 오히려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고 또한 잊혀져가는 잊혀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죄된 인생의 통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생물학적인 출생..

그것과 우리 인생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과 그 가운데의 삶이라고 하는 것, 그 사실이라고 하는 실제를 말할 수 없다는 통념이 있지만 그러한 것만이 있어야 한다는 그러한 생각도 역시 부정적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불확실성에서도 확실성의 여부라는 것에 인식과 그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인생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됩니다. 생물학적인 측면에서는 그 자기 정체성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성경은 바다도 자기 안에 지혜가 없다고 말하고 있고 하늘도 마찬가지로 말하고 있음을 욥이 말한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 생물이라고 하는 것이 아메바와 같은 미생물의 진화라는 개념도 역시 그 자체적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하늘아래의 판단들이라고 하는 것.. 그 보편이라는 세계도 역시 지혜의 실존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님께서 삶을 살펴보면서 우리 인생의 삶과 실제의 판단에서 회의를 가진다는 것은 이미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 "어쩌면, 죽는 것은 나의 의지대로 할 수 있을것 같다."라고 언급하신 것을 기억하는데..

자신의 의지대로 스스로 행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행하는 형상의 모습 그것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죄악으로 인해서 그러한 것을 부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불순종하려고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부정되어진 스스로의 모습..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나의 실존.. 내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라는 것일 때에 내 삶의 의미는 하나님께부터 찾는 것이 합당하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그러한 자의적 느낌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적 판단의 정체성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뜻하심이 내 삶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비롯 주관이라는 판단이면서도 믿음으로 실제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삶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주관적인 믿의 분량적 측면에서 주어지는 개인적인 소명의식으로 인식되어지기 때문에 일반적인 그러한 규범적 모델을 말할 수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일반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통념이라고 하는 것이 처세술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러한 기준들도 각기 주관의 객관화적인 측면의 한 표현일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본다고 하면 믿음으로 행한다는 그러한 가운데서 주의 말씀하심안에서의 자유로움의 실제를 말한다는 그러한 점까지 규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것은 믿음의 분량의 차이라는 개념에서 교단이라는 종교적 종파가 생겨나는데 이러한 가운데서도 역시 주의 말씀안에서 믿음이 분량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의 실제도 말할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둠이 좋겠습니다.

산다는 것의 정체성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에서 찾을 수있으며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의 소명의식에서 산다는 것이 여러가지 개연성의 한 표현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의 실제적인 규정과 증거가 될 수있음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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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저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을까요??

질문 하나님은 왜 저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을까요??

저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었음 좋겠어요...
악을 행하는것두 싫구 내가 생각하므로 죄짓는 것과
내가 생각하므로 상처받는것들...
사람들이 입에서 나오는 말의 상처와 사랑의 감정에서 나오는
질투와 시기들...내가 행동하면서 짓는 죄들과
내가 입으로 말하고 행동하므로 상처 받는 사람들과
주님앞에서 아직 온전히 드리지 못하는 내모습들..
육체의 정욕을 따라가는 나의 모습들..
죄의 유혹의 손길을 뿌리치는 내모습들...
너무나 싫어요..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주시지 않았다면
이러한 것들로 인해 힘들어 하지 않아두 될거같은데...
오직 주님을 높이고 주님께 찬양하며 경배할수 있었을텐데..
전 하나님의 하나의 기계적인 도구 였음 좋겠어요..


답변

먼저 하나님 앞에 참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그러한 선한 중심을 기억하며 그러한 선한 마음이 항상 주 앞에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님께서 질문하신 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인 것같아서.. 좀더 분별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유의지라는 것은 스스로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것을 나타내는 증거적인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 자유로우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자로서 자유롭게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유의지라고하면 일반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는 그러한 자유의지만을 생각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진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들은 주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그 중심에서 진정한 자유의지를 활용할 수 있고 그 기쁨과 감사를 드리는 것이 좀더 긍정적인 중요함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입지 못하는 그러한 불순종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으니 자기 멋대로 행하고 있는 악함을 보는데 그것도 자존하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는 핑계할 수 없는 것으로 주 앞에서 그들이 판단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라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입지 못하는 죄악된 가운데서 나타나는 경향만 주목하지 마시고 긍정적으로 주의 말씀 안에서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믿음의 행함이라고 하는 그 자유도 보시기 원합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도록 하심의 선하심이라고 함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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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확신과 회의에 대하여서..

질문(Anonymous)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도적으로 부정 한적이 있나요?
10년이상이나 사랑해 왔던 하나님의 사랑을 말입니다.
얼마전가지만해도 주님의 일이라면 자신의 시간을 쪼개어 봉사하던 청년이 갑자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자신의 믿음이 불확신 하다며 만약이라는 말과 함께 하나님의로 부터 의도적으로 멀어지고 있습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달란트로 봉사하던 청년이였기에 마음이 아프답니다.
자신은 모태 신앙이였기에 어머니의 믿음으로 인해 신앙 생활을 해왔노라며 자신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것인지 의문 스럽다고 하더군요.
또한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모습이 싫고 착하게 살아야하는 것이 싫다는것입니다.
그 청년의 가정은 아버지가 엄하시긴합니다.물론 아버지는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하였답니다.
그래서 사사건건 아버지와의 충돌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이럴땐 어떤 이야기로 그 마음을 돌이킬수 있을까요?

답변 신앙의 확신과 회의에 대하여서..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부인하게 되어지는 것이 자신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하는 것에 자신의 믿음이 불확신하다고 함이 그 이유이군요..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이유가 되지 않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며 생활해 옴에 대한 불확신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지 그것도 역시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확신할 수 없다고 하는 그러한 인식과 그러한 잘못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확실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질문해둡니다. 그것은 역시 확실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확실하다고 할 수도 있는 그러한 여러 합리성이 있지만 그러한 것들이 상대적이라고 할 때에 그 여지는 항상 남겨두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말입니다.

아 물론.. 이러한 입장을 취하시는 분의 입장은 바로 불가지론입니다. 즉 알 수 없다는 것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질문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 불가지론이 확실한가 그것입니다. 불가지론은 합리성은 있어도 자체적으로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기 때문에 회의적인 입장이라고 해서 그것이 항상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신앙의 확신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는 신앙의 경건이라는 맹목적인 신앙의 형태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태신앙적 입장에서는 한번쯤 다 경험하는 것이지요.. 아버지 어머니가 목사이고 장로이고 권사 집사이시니.. 나도 신앙생활을 잘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누가 어떠한 합리적인 말을 해도 맹목적으로 부인하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에 눈을 뜨면..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불가지론에 대한 입장에서 고민하는 것이 기본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그러한 입장에서는 두가지 즉 계속 맹목적으로 밀고 나가는 신앙을 말하든지 확신할 수 없다는 식으로 신앙에 지친 것에 회피적 입장을 취하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교파가 있습니다만 청교도적인 입장에서는 경건의 훈련에 대한 증거를 할 뿐 진정으로 그 증거의 실재적 가르침과 교훈에는 관심을 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젊은이들이 많이 고민하고 합리성에 맹목적 배타나 맹목적 추종이라는 훈련되어지지 않는 자들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지점에 오기도 합니다.

아 물론 청교도적인 입장의 선함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회의적인 불가지론에 대하여서 답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또한 다른 현대신학이나 또는 다른 교단들도 실재에 대한 눈을 감은 가운데서 답변못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우리 신앙의 확신이라고 하는 것이 합리적 불가지론으로 판단받음에 자체적인 비판정당함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확신은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의 정당함을 가지고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이 상대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할 때에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인 모습이라고 함으로 상대적인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상대적 표현을 상대적이라고 함에서 그 확실성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라는 반문을 한다고 할 때에 그 반분이라고 하는 합리성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문하게 되어지는 그 합리성의 실제적인 판단은 상대적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고 그 여지를 항상 남겨주어야 보편적인 생각이라는 그러한 점에서 전체로서의 지지를 받게 되어지는 확실한 실제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태적인 측면의 그러한 모습을 취한다고 하여도 절대자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면 그러한 판단은 절대자 앞에서 기각되어진다는 것입니다.

합리성만 있다고 그것이 설득력과 그에 따른 납득 당위성으로써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역시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역시 불가지론이라고 함이 상대적 판단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 합리성은 역시 자체적 정당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와 달리 자존의 하나님은 상대적 판단이라고 함의 영역과 상관없이 자존하시는 분으로써 자존의 절대자 자기의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 영역을 취하신다고 할 때에 상대적 비합리성이 있다고 하여도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면 그것은 합당한 합리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 인식에 대하여서

우리가 믿는 믿음과 그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한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그 믿음과 그 내용이라고 할 때에 빈약하다는 개념이나 달리 생각되어지고 심지어 비판되어질 수 있는 정황에 있다고 하여도 그러한 상대적 판단의 하에 본질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진짜 상대적이라고 함을 마음에 둔다면.. 절대자를 부인할 수 있다고 하면 그 부인된 절대자가 진짜 절대자이겠습니까..? 절대자를 부인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진짜 절대자를 생각하지 않는 정직하지 못한 자의 모습입니다.

물론 절대라는 개념을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다는 상대적 표현과 인식이 여러가지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하나님 신을 '무한자' 또는 '무제약자'라는 그러한 말을 하는 독일 철학자 피히테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동일철학자들의 입장에서 인정되어지는 신관이며 이러한 가운데서 비판되어지기도 하는데.. 사실 이미 신을 진정한 자존의 절대자로 생각하지 않는 정직하지 못한 가운데서의 비판과 그 합리성일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존의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는 상대적 판단이라고 함에 이미 메이지 않는 분이시면서도 상대적으로 자신을 자기의 정당함으로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자기 계시입니다.

신앙의 확신이라고 함에 어떻게 확신하느냐는 질문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이 상대적으로도 말씀하실 수 있고 그러한 상대적인 것으로도 실제의 신앙과 그 증거를 삼으신다는 것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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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11월 13, 2004

이방인 같은 느낌에 대하여..

[질문] 교회...

밑에 교회문제로 고민하신분과 같은 비슷한 경우로 저도 십여년간 어려서부터 쭉 다녀온 정든교회를 나왔습니다. 3월정도에요. 그동안의 맘고생 많았지요. 그리고 말씀에 서있는 교회를 다니려고 했습니다.

가능한 집과 가까운 곳으로요. 집앞에 있는 교회에 나갔습니다. 좋았어요. 그런데 그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봉사도 많이 하고, 모르는 사람없이 그렇게 열심있게 신앙생활하다가 집앞에 있는 교회에 편히 나가긴 하지만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이방인같고, 늘 방문객같았어요. 일부로 등록도 빨리 했거든요. 소속감을 가지려고. 그렇지만 교회분위기탓이었는지 그렇게 되었어요. 안되겠더라구요. 그래서 일부러 새벽기도회도 나가고 그랬는데 역시나 이방인같더군요. 교회는 아주 작은 교회인데.

그러다가 다시 여기저기 교회를 다녔습니다. 역시나 방문객이죠. 이제 이런 생활이 오래되다보니 토요일이 되면 주일걱정이 앞섭니다. 어떨땐 주일날 교회 가기 싫을?도 있어요. 예전엔 참 열심히 주님 사모하고, 기도하고, 그랬는데 이젠 조그마한 믿음조차도 아주 사라진 것같아요.

고민이 끝이 없네요. 이제 아예 이런 생활이 되어버렸어요. 마땅히 등록해서 다니고 싶은 교회도 없고. 어쩌지요.... 이러다 아예 주님과 멀어져 버릴 것같아요.


[답변]이방인 같은 느낌..

교회에 적응한다는 개념만으로 생각한다면 그러한 기준으로만 생각한다면 교회를 선정하기 너무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있게 되어지는 교제라는 개념은 좋은, 마음에 드는 그러한 교제만으로 일색되어져야 한다는 그러한 생각은 달리 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저도 신앙적으로 오순절 개념의 교회들 그리고 통성기도라는 개념과 방언과 방언서를 써보았던 자입니다. 그리고 통성기도하고 나면 피가 바닥에 고여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공부하면 할 수록 생각하던 것과 다른 모습에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모교회를 떠나오게 되었는데 사실 생각이 맞는 그러한 교회를 찾기 너무 어렵습니다. 지금도 교역자로서 교회를 개척하고 섬기고 있는데, 노회에 가게 되어지면 아직도 저는 이방인 같이 느껴집니다.

생각이 다른데다가 여러가지 비판할 것이 있음을 볼 때에 너무 괴롭지요.. 하지만 교제라는 개념이 순기능적 개념의 열매로서 좋은 친교가 이루어진다는 개념만으로 정의되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때로는 이방인 같이 생각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연단도 그 열매로서의 귀함을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성도들은 신앙의 양심이라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과 또한 교제 속에서의 정체성 그 자체적 판단을 받지 않는.. 그러면서도 교제하고 생활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교회에 출석함이 옳다고 봅니다.

말도 안되는 교제라.. 특이한 형태의 교제라고 생각하심이 좋겠지요.. 우리 주님이 오셔서 이 세상에 또한 주의 몸된 교회에 항상 환영받는 모습으로 계신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에 담음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출 28장 20절에서 22절에 나타나고 있는 야곱의 서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아버지집에 와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겠다는 그러한 것을 같은 언약의 백성으로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왔습니다'라는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 라는 그러한 고백으로 한 곳을 구별하고 구원을 고백하며 즐거워하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믿는 사람은 그 이미 법적 질서로서 구별되어지는 예배당을 찾아서 그곳에 함께함이 옳은 것입니다.

비록 이방인과 같은 느낌이 있다고 하여도 주님이 세상에 자기 백성에게 오는데 영접하지 않음이라는 이방인과 같이 취급당했던 그 사실이라고 함을 교제속에서 느끼게 하시는 가운데 더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심으로 받음도 좋다는 생각과 또한 그것이 옳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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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충동에 대하여서..

의욕 상실

자살을 하면 지옥 간다는 말씀이 성경에 있나요?
정말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다면....
자살 하는 것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자살 충동에 대하여서..

1. 성경적인 측면에서..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스스로 행하시는 분.. 그 분이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존재하려고 하는 그 노력이라고 함은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것이고 또한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함이 옳은 것이 성경의 증거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자살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를 주관하신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살기 어려운 세상인 것같습니다. 학교 공부 또 사회에 나오면 살기 위한 전쟁, 다시 인생의 펼쳐보기도 전에 접어야 하는 것이 좋겠다는 그러한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한 판단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도 그 가능성이 있는 그러한 판단이 항상 실재적인 실제적인 판단이 아니라고 함도 생각함이 인생에 있어서 지혜가 되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2. 일반적인 철학에서의 도피..

일반 철학적인 차원에서 보면 인간이 언어적으로나 어떤 것을 규정하는 것이 자유임을 말하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러한 불합리한 곳에서 벗어나서 완전한 곳에서 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들이나 또는 내 자신이 내 자신을 주장할 수 있는 자유라는 모순적인 극단적인 판단이 합리성 있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설득력이라는 것은 있지만 그러한 전제나 판단들이 진짜 나의 실존을 내 존재를 맡길만한 사실로서 확실한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모르면 모든 것이 다 잘 모르겠다가 정답처럼 보입니다. 세상에 다 상대적인데 무엇을 받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신다고 할 때에...

상대적으로 부인하고 싶고 비난하고 싶은 나의 인생이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내 삶은 중요한 실재이며 하나님이 기뻐보시는 그러한 자라는 것을 믿음이 진정한 실제적인 판단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거지 나사로도 있습니다. 그는 얼마나 비참했던지.. 그래도 세상적으로 평가절하되어질 수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받아들여졌습니다.

3.'그렇게까지 하면서 살면 뭐하노?'라는 말에 대하여..

'그렇게까지 하면서 살면 뭐하노?'라는 말을 사람들이 말하기도 하는데 그러나 그러한 말이 진정한 실제로 볼 때에 제대로 비판할 수 있는 말인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요즘에는 실제적이지 못한 말들이면서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보이는 말들로 나타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문제를 풀기 전에 그 문제가 잘되었는지 안되었는지 알아보고 문제를 푸는 것이 기본이 되지 않겠습니다. 같은 인간끼리 인간을 평가절하하며 죽음이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기본적인 인간 사상에서도 성립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렇게 말하는 '살아서 뭐할래'하면서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할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윤리적으로나 하나님 앞에서 의미를 상실하는 말입니다. 때로는 너무 착한 사람이어서 다른 사람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시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남감한 일이 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사를 먼저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의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입장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시면서 자살종용이라고 하는 말에 전적 수용할 필요는 없음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세상적이 것으로 볼 때에 '그렇게 살고 싶나'라는 말의 판단들을 무수히 제시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러한 것은 전부 상대적인 것으로써, 진짜루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과 비교되어질 수 없다고 봅니다. 절대자께서 주시고 판단하심의 실재로서 우리의 삶과 일상적인 생명과 영원한 생명은 그러한 비난의 질문이라고 함의 판단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절대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에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절대는 상대적인 것의 반대가 아니라 절대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과 상관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로서 자기 주권적으로 상대적인 것의 관계를 설정해두셨습니다. 그렇다면 절대자의 재가가 있는 것을 상대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속되게 표현해서 '오바'가 아닙니까.. 월권이라는 뜻입니다.

말을 맺으면서..

자살충동은 분명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현실적인 판단과 개연적인 판단에 우리의 존재를 내 맡겨라는 것으로 마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그러한 중심을 가지지만 그러한 '스스로'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점에서 그 '스스로'의 뜻하심에 재가적 차원에서 스스로라는 진정한 실재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살기 어렵고 주위에서 '니 그렇게 초라하게 살려고 하나, 한심하다'라는 판단과 내가 보아도 그러한 판단이 든다고 하여도 판단의 주체로서 하나님을 기억할 때에 내 판단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성도 살아가는 성도는 또 일반적인 사람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이 지으신 자로서 합당한 것입니다.

작은 것에 기뻐하고 주께 감사해보세요..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또한 초라함이라고 하는 것도 상대적이기에 절대의 판단 기준이 아니라는 것과 더 힘든 사람들을 돌아보며 위할 수 있는 넉넉함에서 또한 작지만 감사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삶에 주의 사랑과 평안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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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의 윤리적 문제 극복과 영혼의 향방..

고민상담
낙태 살인

병원에 있으면 별별 일이 다 많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 얼굴이 두꺼워지는 걸 느낄 수 있다. 가방을 들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떼지어 병원으로 들어오는 고등학생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 아이들은 수술하러 들어가는 아이를 무슨 환송 식 하듯 뒤에서 재잘거린다. “잘하고 와, 별거아냐” 뭐 그런 말을 한다. 그리고는 수술이 끝나고 나면 간단한 주사라도 한방 맞고 나온 것처럼 대단찮게 여기며 “아팠니? 밥이나 먹으러 가자” 어쩌구 하면서 수선을 떤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분명히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병원에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불안해진다

제가 이중에 한사람 입니다 이렇게된 영혼은 어디로 가게되는지요? 하나님과 화목해지는 방법은 어떻게해야 돼나요 3개월 전과 3개월 이후의 낙태는 신앙적으로 봤을때 다를수도 있나요 많이 망설이고 고민하다가 상담 드려요 귀한 답변을 기다립니다


답변
낙태의 윤리적 문제 극복과 영혼의 향방..

말씀하신 분은 낙태라는 개념에서 그 비윤리성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그 옳고 그름을 놓고 고민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낙태라고 함과 자연유산이라고 함으로 고통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에서 낙태만으로써의 일방적인 분위기라는 개념보다 좀더 더 보편적인 판단이 있어야 할 것같아서 저의 입장을 말씀드리면서 저의 견해를 말씀드릴까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두가지 측면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그 상관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분적 개념이 아니면서.. 구체성이라는 구별적 개념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는 ,'일반적인 측면에서 언급인 낙태에 대한 윤리적 문제 극복'과 그 '영혼의 향방'이라는 것입니다.

1. 낙태의 윤리적 문제 극복에 대하여서..
1)사람들의 성의식의 실재를 분별함의 중요성에 대하여서..

어제 EBS 방송에서 청소년 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청소년의 성관계에 있어서 남자는 그 책임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과 여학생의 문제는 한번이 어렵지 그 다음에는 대수롭지 않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버스를 타고 오는데 어떤 두 여자분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기를 가져야 한다는 언니된 사람의 말에 그 함께한 여자분은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면 부담이 되고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며 나중에 '엄마 나를 왜 이렇게 낳았어' 라고 질문하면 답변못하는 그 고통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남편 되어진 자도 그러한 자녀계획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친 언니가 자녀 갖는 것에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언니되는 사람은 자녀가 있는 것같기도 한데.. 그러한 건전한 생각들이라고 함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들은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운데서 책임이 없는 자의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물론 그 분들이 교회에 다닌다고 하여도 신앙에 대한 실재적 분별에 입각한 신앙의 지도를 받지 못하는 경향 때문에, 무엇이 실재인지 확신할 수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실재인지 확신하지 못한다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가르침과 일상적인 상식의 실재를 따를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저만 즐겁게 생활하게 되어지는 것이지 그 자녀를 낳는다고 하여도 그들을 통한 유익이라고 함, 복이라고 함의 실재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느냐는 사고입니다.

물론 교회에서 하나님에 대한 실재를 가르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하나님의 실재를 증거하고 있고 가르치려고 노력하고 있음에 대한 것에 이미 판단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도,자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서 마음을 두지 않는 것으로 인해서 삶의 실재라는 것을 제대로 분별하는 것을 가르치지 못했던 것으로써의 한 아픔을 봅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그 실재를 생각한다면 자녀의 복을 말씀하심의 실재를 생각하고 그 음란을 벗어나며 가정의 소중함과 성의 기쁨과 성의 소중함이라고 함을 피부적 쾌락으로 바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 안에서 실재적 판단으로 인한 성의 정체성의 실재를 받으며 또한 가정과 성, 그리고 성의 기쁨의 실재를 제대로 분별하도록 우리 성도들은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서 우리의 다음세대에 잘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실재인지 모르는 가운데서 그 당연한 의무감은 사라지고.. 불가지론으로 흐르는데 신앙은 불가지론에서 의지적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말씀하시므로 내가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도 진정한 실재를 받는다는 점을 기억할 때만이 의식의 전환과 그 한 예로서 성의 정체성과 그 소중함과 그 기쁨을 제대로 누리게 되어짐을 말하게 됩니다.

2) 낙태 의료윤리와 기독교 윤리적 개념에 대하여서..

의료사업도 사회적 분류로 구분해본다면 서비스업에 포함되어집니다. 그러한 것이면서 생명과 관련된 것을 생각한다고 할 때에는 그러한 서비스적 개념에서의 회의를 느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바람직 하지 못하다는 그러한 중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수효라는 그러한 것에 의료행위가 강요되어진 가운데서는 의사의 길을 걷는 분들의 그 심정의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것이라는 주관적이면서도 그 깊은 고통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낙태인데..카돌릭에서는 그 낙태라는 것의 개념을 피임까지도 말하게 되어집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영혼에 대한 가르침이 그 선재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질 때에, 즉 '영혼의 선재설'로 이해되어질 때에 그 '정충'의 행함이라고 하는 것도 영혼과의 상관성을 부인할 수 없다는 개념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영혼의 창조설'을 믿습니다. 아이가 잉태되어진 가운데서의 성장적 개념에 영혼을 하나님께서 잉태와 함께 창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임까지 살인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인간이라고 함의 존재를 예정하신 가운데서 일반적으로 태어나도록 섭리하고 있는데 그러한 것을 어떤 의도 즉 마음에 들지 않은 상대라든지 아니면 단지 쾌락으로만 생각한다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입니다.

그 예를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성경에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관계를 맺어서 자손이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것이 싫어서 질외 사정을 하다가 하나님께 죽임이 되었던 것을 주목하면 피임이라는 것이 무분별하게 정당화 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물론 앞서 예를 든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여기서 접기로하고 성경말씀의 인용적 차원에서만 언급합니다. 지면상..)

부부간에 성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면서도 그 합당한 관계, 결혼이라고 함에 있어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되어지는데 때를 따라서 그들에게 자녀의 축복을 주심에 대한 것을 분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하심을 거역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의료 과학적인 측면에서 수정후 얼마라는 그러한 것을 보건당국에서도 잠정적으로 정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만, 그것은 넘 상대적인 임의적 동의안일뿐이고 하나님 앞에서 그 실재를 말할수 있다는 점을 기억할 때에 상대적인 측면의 모호함을 떠나서 앞서 말한 피임이라고 함 자체의 살인 논란을 정형화 하지 않도록하고 주관적이면서도 실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낙태라는 개념을 앞서는 피임에 대한 것을 살펴보았고 말씀하신 분의 견해와 같이 3개월 이전이나 이후의 개념에서 그 낙태라고 함을 어떻게 말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의 문제를 접근해보겠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사람이 죽고 산다'는 그 개념보다 도 실재적인 것이 없다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주관적인 형태의 믿음이면서도 그 실재를 말한다면 그 기준을 존중하면서도 메이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에 하나님께 반역함에 대하여서 그들을 죽이시는 형벌로서 기적을 베푸심에 대한 것에 대하여서 비 윤리적이라고 함을 말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라는 점에서 이해되어지지만 그 정당함은 역시 상대적인 판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절대자로서의 그 행하심을 상대적으로 생각하겠다고 고집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 절대자이심에 대한 증거로서의 그 형벌을 말하게 되어지며 그러한 것을 믿은 자들은 그러한 판단에서 벗어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라고 함을 기억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녀를 기르지 못한다는 그러한 환경적이나 또는 어떤 기득권적인 판단에서 낙태를 행한다면 그것은 항상 정당화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녀라고 함에 내가 그 아이를 성장시키고 잘 키우지 못함에 있어서는 낙태라고 함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그 책임이 그 사람의 가슴에 남아 있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글을 쓰신 분의 중심에는 나의 아기는 어디 있을까.. 내 아기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 그러한 질문이 아마도 그 양심의 고통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러한 죄악도 다 용서하시지만 그러한 죄에 대한 것을 경계하시고 그 대속의 깊이를 잊지 않도록 그 상처를 남겨두시는 경우를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하신 요즘의 낙태경향이라고 하는 것이 좋은 아들녀석이라는 상대적인 우성적 측면에서의 정체성을 가진 자를 가지고 싶다는 그러한 기준으로 일관하고 있고 그것이 검증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때를 기다리다보니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비윤리적 의료행위를 강요하게 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내 아들 내 딸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그 귀함의 실재를 말할수 있고 인간적으로 아무리 꼼보라고 해도 내 자식이기 땜에 귀한 것이라는 그 기준의 실재를 가지는 것이 이러한 비윤리적 의료행위의 낙태의 죄악을 막을 수 있게 되어진다고 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자존이라는 그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으로서의 절대자의 재가가 실재라는 그 판단이 있을 때만이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봅니다.

2. 영혼의 향방에 대하여서..

낙태되어진 아기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일단 이것은 성립되어지지 않는 질문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가능하면서도 정당함을 하나님 앞에서 상실한 것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아이의 영혼은 살아 있는 우리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판단 아래서 온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한 성경의 예를 주목한다면,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가운데서 아이를 잉태하였는데 그 아이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다윗은 금식하면서 참 다른 신하들이 아이가 이미 죽음에 대한 것을 모르고 기도하는 것을 민망해 하는데 그것을 알고 다윗이 아들이 죽었음을 물어 알고, 그 금식에서 벗어나서 옷을 입고 음식을 먹음과 그가 말함에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대려가심에 자신이 주관할 것이 아니라고 함을 말했던 것입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허용되어진 사후의 영혼의 문제에 대한 것은 카돌릭이 말하는 연옥이라는 곳에서의 장소적 개념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다윗의 언급에서 반박되어지는 것임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믿습니다. 즉 그 아이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태어나지 못하였다고 하면 그는 역시 주의 택한 백성의 반열에 세우실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지옥에 존재적 자리매김이 되어질 것입니다.

정적인 측면에서는 그러한 판단이 넘 극적임에 대한 반론이 있을수 있지만 그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의 합리성과 정당함에 따른 합리성은 같이 판단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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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되어진 '분명한 입장'에 대하여서...

[고민] 전왜이럴까여..

전 하나님을 믿는것도 믿지 않는것도 아닙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에 대해 부정하지만 힘들때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아니..정확히 말하자면....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 도움을 요청합니다. 오늘도 이렇게 찾아왔습니다.하나님께 기도해보라고 하시겠지만.. 제 고민 좀 한번만 들어주세요.... 전 지금 휴학생으로 알바를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과외식인데 오후 출근에다가 보수가 세더라구여.. 전 공부하면서 돈을 벌수도 있겠거니해서 6개월 계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과장의 말과는 달리 따로 공부를 할 수 없을만큼 이 일에 매달려야 된다는 것을 차츰 깨달았습니다.

저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돈버는 것보다 공부라고 생각하니 이 일이 점점 싫어지더라구요.. 계속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만 들고.. 그래서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바를 여러번 이런 식으로 몇개월만에 그만두고 또 그만두고..그래왔거든여.. 이일을 시작한지도 3개월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가족은 다들 "니가 얼마나 가나 했다" "힘들다고 바로 그만두느냐" "앞으로 뭘하려고 그렇게 끈기가 없냐"고 말합니다. 주위 선생님들도 "책임감을 좀 길러라"라고 충고합니다. 정말 일이 힘들고 싫어서 회피하려는 마음때문인가. 아니면 진짜 공부를 해야하기 때문인가...를 저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이 일이 많이 힘들어서 하기 싫다는 생각도 많거든여.. 저 스스로 힘든 일에서 회피하려는 약한 모습을 보기 때문에 끝까지 버텨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계속 이 일을 하게 되면 끝까지 스스로 견뎌낼 수 있을까도 의문입니다. 너무 답답해서 횡설수설 써내려갔습니다. 이번주중으로 결정을 해야할 것 같은데 모르겠습니다..정말.. 전 왜이럴까여..




[답변]
강요되어진 '분명한 입장'에 대하여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부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절대자는 절대자가 아니겠지요..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삶이 살아가면서 태도라든지 입장을 분명히 하여야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외적인 것이 있어서 오히려 입장이 분명하면서도 분명히 않아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은 자기의 판단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또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해야만하는 당위성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경우도 포함되어집니다. 부모님이나 주위에 있는 분들이 그 분명함을 보이라는 것의 일환으로 어떤 노력이라고 함의 완성적 표현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을 강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글을 쓰신 님이 먼저 앞서 말한 것들을 이해하시고 꼭 주위의 강요적 입장에서의 분명함으로서의 인내적 결과물을 요구한다는 점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그러한 것을 분별하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 저 역시 주위에 한 사람으로 말씀드릴 수 있다고 봅니다.

좀 조심하셨으면 하는 것은.. 사람이 자기 정체성이나 자기가 판단하고 표현하는 것이 주위의 사람들의 입장이라고 함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자신에 대하여서 의문을 갖는다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생각만으로 주위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지혜롭지 못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자기의 생각을 스스로 하고 결정함에 대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세요.. 그리고 그러한 것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참고해서 그리고 표현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납득하고 동의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 함, 즉 설득이 되어질 수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의 정당한 당당한 자기 표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의 형상을 닮아서 지음받았기 때문에 스스로 판단하고 행하고 노력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그 정당함이 판단되어진다는 것과 사람들의 판단이라고 함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윤리적 차원에서의 맞다고 생각되어지는 범위와 기준에서 행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래서 강요되어진 주위의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자신에 대한 회의적 판단을 하시는 것보다는 자신의 주체적인 생각과 판단에서 환경에 대한 말들을 가지고 자신을 성숙시킬 수 있는 요소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할 것같습니다.

구체적인 질문에 대하여서는...

일이냐 공부냐 이것은 주관적 판단이기 때문에 자신의 주관적 판단을 배제한 상대방의 분명을 위한 강요적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판단하기 보다는.. 공부가 더 중요하다고 자신이 생각하면 좀더 공부할 수 있는 알바를 찾아봐야 하겠지요.. 물론 알바를 찾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지만말입니다...

그리고 알바라고 함이 어려워서 공부를 탓하고 있는 것과 같은 자신의 생각에 대해 전혀 자신이 없어 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알바를 함이 좋지요.. 잠시 공부를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공부를 위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체적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그리고 글을 쓰신 분이 너무 착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주위에 있는 분들에게 순종도 잘하시고.. 그 말씀하심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분같습니다.

그러한 모습은 좋습니다. 그러면서도 님을 바라보는 주위에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씀하심의 뜻은 님이 참으로 자기 주관과 자신의 삶을 잘 영위해나가는 그러한 사람이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주위의 사람들의 말과 판단이라고 함 보다도 그 위하는 마음과 뜻을 알아서 그들의 말에 액면적인 강요에 대한 순종보다는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성숙한 자리에 서는 것이 더 아름다운 모습이 될 수 있을 것같습니다.

결코 글을 쓴 분 자신에 어떤 결함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 착하기 때문에, 자기자신의 주장을 말하고 표현함에 소극적이었던 가운데서 딜레마가 있었던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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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11월 12, 2004

신앙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신앙에서 어려운 문제들을 놓고 같이 고민하며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고 또 섬길 수 있다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ecrio.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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