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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11월 07, 2014

답변, 신천지가 한국의 기성교단에게 묻겠다 1, 2

답변에 있어서

우리가 마음에 두게 되는 것은 '그 질문이라는 것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질문이 성립되지 않는 가운데서 답변이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답변의 유무로만 자기 만족을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질문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서로의 인식의 타당성이 있는 가운데서 그 질문과 그에 다른 답변의 존재와 그 가치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대화나 질문과 답변을 의식한 가운데서는 서로 공통적으로 전제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는 것이 또는 표현한 가운데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물론 성경과 신학이나 아니면 생각의 입장이 많이 전제되어진다는 것 뿐 아니라 대화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입장차이를 확인하는 가운데서 대화를 하는 것이 즉 질문과 답변이라는 것이 제대로 되어질 것으로 보인다. 답변을 위한 수행적 모순이면서도 글로 답변을 표현한다.


그렇기에 먼저 신천지의 입장에 대한 것을 전반적인 측면에서 다른 비판적 입장을 말한다면


첫째로 너무 단순하다는 것이다.

원래 단순한 것이 아주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지만 '단순하다'는 개념이 분별력이 갖춰지지 않은 것의 범주로 넘어갈 수 있다면 답변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판단을 함에 있어서는 당위성을 가질 수도 있다고 보여진다. 답변의 당위성도 사라질 수 있다.

인간의 말로 가르친다고 비판하면서도, 자기들은 그런 입장을 취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즉 9면에 나타나고 있는 소위 '육하원칙'이 그것이다.1)

그리고 무료로 가르친다고 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성경을 인용한다고 해도 잘 인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본문에서는 일하는 자의 받을 보수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을 가르친다고 함에 있어서 복음은 무료라는 개념으로 가르쳐질 수가 없는 것이다. 복음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 때 그것에 걸맞는 돈에 대한 시비가 되는 것이지 교육비라는 개념과 복음이라는 것의 비용과 무분별하게 비교하고 실천한다는 것이 그 단순함에서 지나치는 것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2)



둘째로 성경 인용이 임의적이다.

자기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성경본문을 인용하고 있는데, 성경의 본문의 문맥이나 전반적인 고려는 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인용하는 것으로 빈축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진부한 표현일 수 있을 정도로 일반적이다. 즉 무료라는 개념이 예수님이 거저주라고 하심이란 말씀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일하는 자에 대한 수고를 알아주고 그 비용을 받는 것에 대한 다른 본문은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것이 그런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 말씀이 다른 말씀보다 더 영감이 있다는 부분 영감설이나,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다는 사회적 개념이나 한 부분을 의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온기독교센터에서의 교육함에 육하원칙의 교수법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그런 신학적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전제되어지는 것이니 어떤 기준이라면 임의적이고 필요에 따른 개념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란 생각이 강요된다.3)


셋째로 신학적 배경이 없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신학교에서 육하원칙이란 세상적 학문의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는 정도로 성경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면 성경을 맹목적으로 내세우는 것도 민망할 수준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영감의 개념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개념도 바르게 말하지 못하고,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단편적 논리4)에 매우 선적인 확실성이 정당한 것과 같이 포장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에 즈음해서


신문 1면에 나오는 구호들 '기성 교단 소속 신앙인들아! 거기서 나오라', '신천지가 한국의 기성교단에게 묻겠다'라는 말들은 어떤 논지는 없고 그냥 구호에 그치는 앞서 지적한 자기 주장에서 성토하는 글들 뿐이고 '모순된 자본주의적 개념의 단면'을 기독교에 적용해서 묘사한 그림, 전혀 달란트 재능 섬김에 대한 개념 없는 우화를 가지고 소리치고 있다.


말을 시작 전에 언급한 것과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그 영감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 인용을 통해 자기 주장을 말하기만 하는 자가 질문하는 것이 성립이 될 수 없는 것인데, 답변하지 않으면 득세한 것처럼 자위하는 사람들 이미 그것에 대한 답변이 나와 있는데도 경솔히 말할 수 있는 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말하는 이들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대 원시적 논리의 확실성이 빗어낸 하나의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종말의 개념도 상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개념도 엉망이고, 참되다고 하는 임의적 한 사람을 통해 배타적으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모습들, 전형적인 이단의 한 모습을 본다. 이것이 그들의 말에 대한 답변을 위한 하나의 답변으로 내놓는다.


아직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성경의 영감에 대해서 잘 모르는, 합리성이라는 개념이 단순 논리에서 비롯되어질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젊은이들을 미혹하는 것은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닌 것이다. 더욱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들의 기득권밖에는 다른 이유를 가지지 못하는 가운데서 임의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주께서 판단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펜을 놓는다.




















각주1) 마르흐레이트 데 헤이르,철학이 된 엉뚱한 생각들, 김기철 옮김 안광복 감수, 원더박스 2014, p. 22.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 영국의 작가이자 시인, 나에게는 여섯 명의 정직한 하인이있다네(내가 아는 것은 모두 그들에게 배웠다네) 그들의 이름은 무엇, 왜, 언제, 어떻게, 어디서 그리고 누구라네, 이 시는 인간의 분석 능력에 대해 읊고 있음, 인간은 구체적인 정보를 모를 때는 이 여섯 가지 물음들을 이용하지


언급된 신천지 신문과 주요 저서에서는 육하원칙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 시온기독교선교센터에서는 이 모든 것을 육하원칙으로 밝히 알려주고 있고, 신천지 성도는 지극히 작은 자도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2014 여름호 VOL15호 발행일 201477일'의 9

증거장막 성전은증거장막이라는 이름 그대로 계시록의 실상을 성경과 함께 육하원칙으로 증거하는 곳이다.” <요한계시록의 실상> p. 331. 이필찬, 신천지 요한계시록 해석 해부하기 동영상 강의 27강 중, 자료 재인용
 

각주2) 무료라는 개념이 성경적이라는 말에 있어서는 너무 단순하다는 개념을 지나 생각의 결핍을 말할 있다고 하겠다. 아주 선동적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런 슬로건에 앞서 자본 이해와 자본주의 또는 사회적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거나 또는 배타적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다. 마치 자본주의 비판을 하는 마르크스의 자본 이해와 비슷한 타도적 개념으로 읽게 되어지는 경향도 지식층이나 마음이 상한 자들의 편들기에 편승하고자 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쉽게 표현하면 가진 자를 타도하고 다 나눠줘라는 공산주의, 성경은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달란트 비유가 회폐이면서도 재능이라고 함을 말할 때에 그 재능에 대하여서 그 일함에 대하여서 알아주고 더 잘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으로서 자본주의적 사회 인식과 비교된다. 모순이 있는 현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서 '수정자본주의적 경향'이 있지만 더 바르게 수정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본주의체제적 개념에 비교되어지는 것처럼 섬김과 또한 알아주고 배려하고 존중하는 개념을 상품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마르크스적 발상과 연결되어진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재능을 다 발휘하도록 돕고 알아주고 섬기는 모습은 사회적 개념이나 통념과 약한자 편들기적 개념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현실적 개념에서 혹 개개의 그런 부패된 모습이 있다고 하여서 그것이 전체인 것과 같이 확대해석하여 표현하는 것은 당위성을 얻을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필찬 교수도 신천지의 성경 인용에 대해서 아주 쉽게 편하게 인용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에서 말씀이라는 개념도 임의적으로 적용하고 있고 세상을 심판한다는 것보다도 기성교회 심판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각주4) 단편적 논리를 언급함에 있어서 첫째로 성경의 영감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성경 본문의 글자적 연관성에 또 상황적 해석 가능성에 있어서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적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성경임을 기억할 때에 그냥 불러주는 개념 들려주는 보여주는 개념이 아니라 유기적 영감되었음을 기억할 때에 사도 요한이 가지고 있었던 그 묵시문학적 개념의 사상들도 고려되어지는 가운데 그 계시를 깨달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필찬 교수는 이러한 점에 대하여서 언급하면서 스가랴서의 네 말에 대한 것과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심판을 알리는 말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잘못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둘째로 영감되었음에 대한 개념 뿐 아니라 종말의 개념도 성경적이지 않다. 종말을 상식적인 측면에 뒤에 나오는 시간적 개념으로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초림과 다시 오심의 교회 시대를 종말로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말의 시점적 개념은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은 사도행전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 종말의 때는 교회 시대라고 함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로 이필찬 교수의 지적을 소개하면, 대언자, 참 목자라는 지칭은 이만희씨를 말하고 있는데, 영체로 마지막에 그(이만희 씨)에게 임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 외에 예수님의 임함은 다른 곳에는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만희씨 소속 외에는 예언의 말씀이 있을 수 없고 다 인간의 말을 하고 있다는 식의 이분적 개념을 취하고 있다. 이것이 신천지의 역동성과 기존교회를 증오하게 만들기도 하고 아주 불쌍하게 생각하게 만들 수 있는 기만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의 앞서 이교수는 신천지가 요한 계시록을 주장하고 이만희씨를 말하게 되는 것으로 예수님이 지상에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마지막에 사도 요한이 계시를 보고 요한 계시록을 썼다. 그래서 사도 요한격의 사람이 있을 것인데 후대에 이만희씨가 그런 입장을 취한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보혜사, 이만희의 저서로 알려진 '요한계시록의 실상'이라는 책을 분석하면서 이필찬 교수가 지적한 바인데, 그 내용적 입장에 대하서 판단하건데 예수님은 마지막에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셨는데, '암행어사식'으로 먼저 왔다는 식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개체에게 임한다는 개념도 잘못된 것이다.


아마도 이것을 위해 그들은 삼위일체를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삼위일체를 부인함으로써 이만희씨의 입지가 곤고해지기 때문이다.


단편적이란 말은 아주 선적인 연관성과 귀결성을 말하고 있으면서 합리성의 매듭은 쉽게, 고민함이 없이 어쩜 경솔하게 비유적 개념으로나 임의적으로 넘어가는 가운데서 아주 시각적으로 논리적 모습이 있기 때문에 논리에 대하여서 잘 모르는 사람은 굉장이 논리적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일관성의 확보가 잘 되어 있다. 그렇지만 정당성의 문제는 고려하지 않은 합리성인 것이다. 정당하지 못하게 속이는 자의 말도 일관성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정당성의 확보로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합리성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 둔다.





참고
1. 오늘 밖에 볼 일이 있어 나갔는데 신문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형태의 '종이 뭉치'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냥 버릴까 하다가 예의상 읽어주고 또 질문하기에 답변해주는 것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2. 그 '종이 뭉치'에는 '2014 여름호 VOL 제15호 발행일 2014년 7월7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면과 5면에 기록되어진 질문들을 중심으로 언급한 내용들을 몇가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 이필찬 교수의 신천지 요한계시록 해부하기 강의를 추천하는 바 입니다. 비단 신천지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의 한 형태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목요일, 9월 13, 2007

아프간 피랍자 합동 기자회견 문답

(안양=연합뉴스) 김경태 기자 = 아프가니스탄 피랍자 21명은 12일 샘안양병원에서 퇴원을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룹별로 다르기는 하지만) 일부는 24차례 이동하며 감금 상태에서 개종을 강요당하고 폭행을 당하면서 노예같은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이들과의 일문일답 중 새로운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했다.

-- 외신에서 나온 '민소매 차림' 보도 등이 사실인가.

▲ (임현주) 민소매 차림은 비상적인 보도다. 현지인 복장을 구매해 입고 온몸을 가리는 큰 스카프를 착용했다. (호화버스 보도에 대해) 매일 칸다하르로 운행되는 시외버스를 전세로 빌렸다. 검문하던 경찰들로부터 좋은 일 한다는 말을 들었고 가즈니 초소를 지나갈 때에는 환영받으며 지나갔다.


-- 국내 비난여론이 여전한데.

▲ (김경자) 귀국해 언론을 접했을 때 저희 팀과 상관없는 많은 일들이 잘못 알려져 있어 안타까웠다.

(유경식) 민소매 차림, 쇼핑, 호화버스. 서면 여행자제요청 사전 인지 등은 전혀 사실 아니다. 교육.의료봉사를 했는데 마치 길거리에서 선교하고 개종을 요구한 것 처럼 알려졌다.


-- 이선영씨 미니홈피에 나온 '이슬람사원 예배'는 사실인가.

▲ (이선영) 2005년 칸다하르 모스크를 방문했을 때 관리인 허락 하에 노래를 한 곡을 불렀다. 우연히 일어난 에피소드였고 그들의 종교를 침해하며 한 일 아니다.


-- 정부의 여행자제 공문에 대해 사전에 알고 있었나.

▲ (이선영) 6월초부터 비자발급 일을 맡아 진행했는데 어떤 기관 단체나 기관으로부터 안전에 대한 공식 공문이나 서신, 공지를 받지 못했다. 다른 기관을 통해 갈 예정이었는데 필요없을 정도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작년에 어떤 단체가 행한 일을 우리가 한 일 처럼 알려진 것 같다.

그룹별 억류생활을 말해달라.

--
(유경식) 그룹별로 다르다. 비교적 잘 대해준데도 있고 그렇지 않은데도 있다. (유정화) 죽음의 공포였다. 비디오를 여러 번 촬영했다. 구덩이가 파진 곳에서 기관총을 겨누는 상황이었다. 억류 마지막에는 이슬람을 믿으면 살려주겠다고 위협했다. 자극할까 소리 내 울지못하고 임현주씨 품에 안겨 반나절을 보내야 했다. 지금도 카메라를 바로 볼 수 없다.

(제창희) 남부 산악지대(해발 3천m)에서 20일을 보냈다. 산을 깎아 만든 토굴에서 생활했다. (40일간 입었다는 분홍색 반소매 티와 구멍뚫린 연회색 바지를 공개) 맨 손으로 오토바이 길을 내게 했고 물 기는 것, 불 때는 것 이외에 토굴에 들어온 독사를 나무로 잡아야 했다. 구타를 많이 당했다. 대검을 총에 착검한 상태에서 종교를 강요당했다. 목에 총기로 겨누고 나뭇가지와 발로 때렸다. 송병우씨는 구덩이에 빠져 가슴 뼈를 다쳤다. 씻지 못하고 필수품도 없었다. 화장지가 없어 책 뜯어 휴지로 사용했다. 여성들은 몸을 가리고 있어 머리에 진물이 나고 해충에 많이 물렸다.

(차혜진) 12번 이동했다. 처음엔 헛간 창고서 탈레반과 24시간 함께 지냈다. 나중에 민가에서 지내며 오토바이로 2명씩 이동했다. 중간에 도보로 이동할 때 남자들은 눈을 가렸다.

(한지영) 좁은 공간에서 탈레반과 함께 있었다. (울먹이며)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 안에서 10여 일간 하루 1시간씩 자며 거의 먹지못했다. 생리적 고통도 있지만 감금생활에 따른 심리적 고통이 크다.

(고세훈) 우리 팀은 매일 밤 이동했다. 민가서 24번 이동했다. 전쟁지역이라 그런지 화장실 갈 때 폭탄이 터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한 방에 탈레반 2명의 감시를 받으며 함께 먹고 자는 상황이었다.


-- 개종 강요와 폭력이 있었다는데.

▲ (제창희) 개종 강요하면서 그 중 몇 명에게 폭력을 가했다. 돌을 던지고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위협했다. 나뭇가지를 꺾어 때리며 개종을 강요했다. 여자들도 토굴로 들어와 총으로 위협하며 개종 강요했다. 5번 정도 기도했는데 개종문을 따라 하라고 시켜면서 반복적으로 때렸다.


-- 배형규 목사 피살 상황은.

▲ (한지영) 두 그룹을 나눠 민가에 도착하자 마자 배 목사의 성과 이름을 확인하고 목사님을 데리고 나갔다. 우리를 쳐다보지 않으며 걸음을 옮기면서 '믿음으로 승리하세요'라고 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게 마지막이었다.


-- 서명화씨 '바지 피랍일지'에 집과 통화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 (서명화) 한 집에 탈레반 3명과 같이 있을 때 우호적으로 대해줬다. 아프간 이름도 지어주었다. 간절히 통화를 원한다고 해 남편과 짧게 통화했다. '안전하게 잘 있다.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끊었다.


-- 동영상 촬영 및 언론과 전화통화한 과정은.

▲ (임현주) 강제로 서너번했다. 현지어 알기에 네 다섯번 통화했는데 무조건 BBC라고 얘기했다. 대부분 아프고 매일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요구를 듣지 않으면 살해하겠다고 했다. 대통령, 교황, 유엔 사무총장 이름 대며 간절하게 연기하라고 했다.

(유정화) 영어로 했다.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아 천장에 매달아 놓아 큰소리로 외쳤다. 위협적인 상황에서 시킨대로 했다. 두번째 인터뷰에선 아픈 것을 말하지 말라고 했다.


- 잘 대해준 탈레반도 있나.

(고세훈) 매일 이동하며 샌들 끈이 끊어져 운동화를 사왔는데 한국제품이더라. 이동이 수월했다.

(서경석) 누나와 떨어져 걱정인데 탈레반에게 말해 쪽지를 일주일에 한 번 주고받았다.


-- 앞으로 아프간 등 위험지역에서 선교할 의향이 있는지.

▲ (유경식) 해외선교 전반에 대해서는 교계에서 논의 중이어서 정리되면 그 것에 따를 생각이다.


-- 몸값 지불 및 구상권 청구 논란에 대한 생각은.

▲ (유경식) 구상권은 이미 정부가 입장을 밝혔다. 교회에서도 입장을 밝힌 것 알고 있다. 교회와 정부 하는대로 따라 갈 것이다. 국민과 정부에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큰 심려 끼쳐 거듭 죄송하다. 죽었을 것인데 살아난 만큼 남은 삶을 국민 사랑과 기대에 부응하겠다. 사랑하고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겠다.


-- 이주연씨 어머니 간증 동영상 논란에 대해.

▲ (이주연) 동영상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시기가 부적절하거나 내용 등에서 불편을 느낀 분들이 많다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출처 : 예수그리스도 향기카페, ☎ Cafe 자유게시판 ☎ 글쓴이: 요엘 번호 : 20894 조회수 : 28 2007.09.12 15:29

글쓴이 견해 : 피랍자들의 언급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정부의 위험에 대한 고지로서의 공문을 받은 것이 없다는 언급에서 볼 때 여러 언론에서의 '국가의 권고를 무시하고'라는 말을 중심으로 비판 언급 한 것은 잘못된 오보임을 마음에 두게 된다.

이선영 : 제가 6월부터 비자 발급과 관련된 일을 진행했다. 비자 발급 과정에서 어떤 단체나 기관에서도 안전에 대한 공식적인 공문을 받지 못했다.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었다. 돌아와서 인터넷에서 떠도는 글에 대해 들었는데, 지난해 다른 단체에서 행한 일이 우리가 한 일처럼 알려졌다. 어떤 단체나 기관으로부터 그런 공지나 서신을 받은 적 없다.

이선영 : 거듭 말하지만 돌아와서 그런 내용을 듣고 당황했다. 비자 관련해서 초청장을 발급 받을 때 단체나 기관으로부터 공문을 받거나 이야기를 들은 적 없다. 순조롭게 비자를 발급받았다. (비자 발급을 거부당한 적 있다고 들었다.) 그건 비자 문제가 아니라 초청장에 관한 일인데, 위험해서가 아니라 단체 간 이해관계 때문이다.

출처 : 예수그리스도 향기카페, ☎ Cafe 자유게시판 ☎ 글쓴이: yes24 번호 : 20898조회수 : 402007.09.13 08:09 '피랍자 21명 퇴원 기자회견서 억류 과정 상세히 설명'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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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5월 11, 2007

교회에 대한 이해를 위한 설교및 글모음

1. 교회개혁은 질서를 통해서되어야 한다
직임과 명령이해

2. 교회의 형제가 부끄러워질 때
형제가 부끄러워질때


3. 십일조와 주일성수에 대해서

십일조(신명기26장 본문설교 中)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이유와 증거

*예배당출석이라는 언급이 있는 부분을 참고할 것

창세기창 28:16~22에서 보는 것과 같이 아버지집에 왔음과 같이 믿어 주의 구원을 증거하는 중심으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것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이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때에 십일조가 구약적 개념이라고 한정시키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4. 예수님을 믿는 것은 구원받기 위한 것인가?
서기관의 의문

기독교는 구원을 말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 개념없이 구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님을 기억함이 옳은 것이다.


5.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가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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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8월 15, 2006

신의 존재 증명할 수 있는가

[질문] 신이 존재하는 것을 성경이나 개인적인 신앙 체험을 배제하면서 증명할 수 있느냐

다름이 아니라 제가 몇 주일 전에 인도를 갔다 왔습니다.
거기서 여행을 하던 중에 같이 동행 했던 누나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제 친구 말로는 존재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푼다고 이야기 했는데(물론 어디까지나 친구의 말입니다) 저는 이것을 신학적으로 풀고 싶습니다. 아직도 저의 기억에 남는 질문인데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어서..



[답변] 신은 존재증명적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다만 믿음의 대상입니다.

일반적으로 질문의 성격이라고 하는 것이 오도되어진 상황에서 납득되어져온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납득되어짐을 말하는 것은 신존재증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찬반 또는 학설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거론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있어서 먼저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1) 우리가 존재라고 하는 것의 사실성이 증명이라고 하는 것으로 확고히 나타나게 되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항상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은 고정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증명이 항상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반론적 답변에 확실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증명이라고 하는 것이 실존을 항상 말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한 답변이 절대적이어야 신 존재증명에 대한 필요성과 중요성과 사실성이 확보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을 때에, 그 충족성이 절대적인가에 대한 재고가 분명치 않은 가운데서 개연적으로 증명이 실존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개념이 하나의 맹신적인 개념으로 잘못된 개념으로 통념화되어져있다는 것에 대하여서 비판적 시각이 필요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러한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반론적인 필요성에 따른 증명을 말할 수 있는 여지적 강조로 입장을 취할 수도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는 범주 설정이라고 하는 개념이 역시 잘못되었다는 것으로 답변하게 됩니다.

상대적인 범주에서 절대라는 비로소의 개념을 자체적인 개념을 찾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없다는 것이 상식적인 측면에서도 정당한 인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상대적인 범주에서는 절대를 논할 수 없고 비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즉 증명이라고 하는 것의 실존적 의미를 위해 합리성의 재구성을 위한 사료적인 개념의 요소를 상대적인 범주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증명이 불가한 것입니다. 즉 신존재증명신을 부정하는 증명도 그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신존재증명을 말하게 되는 잘못된 인식들에 대한 재고..

앞서 지적한 것과 같이 인식의 확신을 위한 최선으로써의 한 필요성에 대한 수단적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의 당위성에서 비롯되어진 것입니다. 종교개혁이전 중세이전 고대의 변증가들이 하나님을 이성적으로도 합당한 납득 당위성이 있는 분이심에 대한 변호적 개념을 위해서 철학적인 개념을 사실분별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받아들여서 말하는 가운데 그 고통의 문은 열렸던 것(각주1)입니다.

이러한 것은 비평학이 시작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단지 병렬적 나열적 상호관계적 개념을 임의적으로 말하는 가운데서 합당한 하나님의 이름의 대한 실제적 기반을 말하지 못하고 조작적 개념으로써의 문서설이 탄생하게 되었고 그것은 합목적성이 부정되어진 가운데서 합리성의 깊이를 재고하는 가운데 이성의 익사사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회적으로 인식이 경험적 실증주의적 개념으로 나아가는 가운데서 더욱 그러한 합리성의 부정의 시비를 간과하는 가운데서 잘못된 정교함만을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믿음의 확신이라고 하는 것을 위해서 그 정당함을 자존의 하나님께 두는 것의 정당함을 마음에 두지 못하고 이성적인 확실성을 말한다는 병열적 개념으로 말하고자 하는 합목적성에서 증명이라고 하는 사실을 가지고 비로소 증거하려고하는 것에서 고통이 있게 되어진 것입니다.

증명을 말하게 되는 것은 확신을 위한 것으로써의 합목적성에 당위성이 있었던 것이며, 그 확신이라고 하는 것을 달리 합당하게 주목한다고 할 때에, 증명이라고 하는 것은 비로소 확신을 주는 주체로서의 모습은 합당하게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신 존재증명은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상대적인 범주에서 규정되어질 수 있고 실존되어질 수 있는 존재증명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하는 것과 신에 대한 확신이라는 것을 위한 증명적인 형식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증명이라고 하는 것이 확신에 근거하기 위한 것인 것과 같이 확신의 그 정도가 부인할 수 없을 때에는 증명적인 개념의 표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존재증명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진 확실성을 위한 비로소의 존재증명적 확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자존의 절대자이심에 대한 확신은 주의 말씀하심에서 찾게 되어지고 그 주의 말씀을 표현하는 형식적인 측면의 한 택스트라는 제한적인 양식에도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는 것이라는 점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즉 성경이라고 하는 한 책의 표현이라는 한정적 의미에서 다른 책들과의 형평성에서 비교되어질 수 있는 편협성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도 절대자가 절대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심과 계시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에서 성도의 매타인식적 신지식은 그 확실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증명해서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른 확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각주1)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이형기 차종순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 19 ; p. 57
'유태인 필로(Philo)는 희랍어권 알렉산드리아에 살면서 앞으로 다가올 세대들에게 그렇게도 풍부하고 뜻깊은 사상을 잉태시켜 주었다. 필로는 구약성경을 플라톤적인 의미의 우의(allegorically)로 해석함으로써 유태주의와 헬라주의를 조화시켜 놓았다. '(p. 19)

“필로는 이방 세계에서 모든 지식은 따지고 보면 유태주의가 그 뿌리라고 주장했다. 왕국의 이론도 유태적이라고 생각하며, 플라톤의 형이상학, 피타고라스의 수, 희랍 과학의 우주론, 헬라화 세계의 신비주의, 윤리, 심리학 등등 모든 것들을 자신이 유태인으로서 이방 세계에서 배웠으나, 이것들은 희랍인들이 모세에게서 배운 것들에 불과하다.” Erwin R. Goodenough, An Introduction to Philo Judaeus, 2nd ed. (New York : Barnes & Noble, 1963), p.75. (p. 57 각주 34번인용함)


이러한 것은 카돌릭교회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에뜨엔느 질송의 표현이 이렇게 언급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하나님의 이름 이름 중에서 하나님에게 아주 적절한 이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곧 "스스로 존재하는자"(qui est)란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바로 존재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 외에는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Non significat forman aliquam sed ipsum esse). 이 원칙에는 다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풍부함이 있다. 이제 제시된 모든 연구는 단지 그 결과들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한 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은 존재(Being)이시다 그것이 기독교 철학의 모퉁이 돌이며, 이를 놓은 이는 플라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모세인 것이다"

Etienne Gilson, The Spirit of Mediaeval Philosophy, 1936, p. 51

에띠엔느 질송, '토미스트 실재론과 인식비판' 이재용옮김 서광사 p12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상당한 기대감을 가져다 준다. 마치 질송의 사상에서 기독교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구현해보려는 일관성이 있는 노력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음듯이 보인다. 하나님에게서는 존재와 본질이 동연적(coterminous)이라는 진리를 참으로 본 사람은 모든 실재를 자충족적인 하나님의 전제의 빛에서 해석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질송은 그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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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7월 05, 2006

트랜스젠더(transgender) - 동성애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트랜스젠더 - 동성애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서론에 있어서

세상에는 이해되어질 수 있어도 납득되어질 수 없는 일도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상식적인 입장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상식이라고 하는 것이 시대적 해석에서 다시 재고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있으나 그러한 그러한 여지라고 하는 것 자체도 여전히 의문시 되어지기 때문에 어떤 획일적인 납득 당위성을 특수적 상황의 편린적 입장으로 인식의 당위성을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트랜스젠더, 동성애자들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인간으로서는 이해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있습니다. 물론 이해와 용납의 당위성이 항상 같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성에 대한 시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주관적인 성 호르몬 분비에 따른 자신의 의지적 선택의 범위를 넘어서는 가운데서의 그 고통은 글쓰는 본인도 알 수 없는 너무나 큰 고통이 되어질 수 있다고 함에 있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하여도 이해하려는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인간으로서의 성에 대한 인식과 느낌과 생활에 대하여서 다르다는 것에 대하여서 어떤 대안이나 합의되어질 수 있는 기준을 찾아서 규정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에 있어서도 그 기준 자체적 존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찾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 기준은 없어서 임의적으로 말해도 된다는 것은 인권이라는 보편적 입장으로 정당화 되어질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찾을 수 없다고 하여도 존재하는 것이 많이 있고 이성적 확인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도 그 실존과 실존이해는 납득되어지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트랜스젠더의 입장도 바로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정체성의 시비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입장으로써, 이미 획득되어지고자 하는 것의 기득권적 인권의 보편성으로써, 정체성의 정당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입장의 당위성으로 다른 사람들의 인식적 보편성에 상당한 어려움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딜레마에서도 분명한 시비는 가려진다고 함을 먼저 말씀드리면서 동성애자들의 신앙적 정당함에 대한 주장에 대한 시비에 대하여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인권이라고 하는 것의 보편성은 모두 존중되어져야 하고 그것의 존중이 진정한 사회에서의 행복추구권으로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인권의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도 상대적인 보편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인권이라는 보편성과 비교할 때에 소수라는 특정인들의 당위성을 피해의식적인 측면에서라도 세우고자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동정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정당함은 재고되어야 하는 보편성으로서 자리매김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더욱 자존자로서의 신의 자존적 절대보편이라고 하는 속성은 앞서 말씀드린 인권이라는 상대적 보편이라고 하는 것으로 비로소 합리화되어지거나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기억할 때에 한정되어질 수 밖에 없고 그 가운데서 고통은 있으나 그 선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 성전환이라는 행위로 인한 경험의 사실이 정당화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합당한 것은 본래의 성으로 회복하고 그 고통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음이 옳은 것입니다.

트랜스젠더 입장에서의 정체성에 대한 변명에 대한 언급에 대하여서 인용과 답변의 글을 쓰고 결론적인 측면에서 전반적인 언급을 하도록하고 결론후에 재기되어질 수 있는 질문과 답변의 말을 꼬리말 형식으로 언급해두도록 하겠습니다.

본론에 즈음해서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라는 점에 대하여서..
인용

"2004년 6월 18일과 19일 양일에 걸쳐 '성적 소수자'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성격의 행사가 열려 큰 관심을 끌었다.한기연(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에서 주최하고 재미 신학자 현경 교수가 강연에 나선 '강요된 침묵, 기독교 안의 동성애 - 입을 떼다' 행사와 5회 째를 맞은 '모두를 위한 자유와 평등 - 2004 퀴어(queer)문화 축제'의 '퍼레이드 2004'가 그것.

특히 두 행사엔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가해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에 대한 편견'이 많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답글

포스트모던적 개념에서 주목하면 특히 니체를 비롯해 그를 추종하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현대의 보편적인 구조라고 하는 것을 깨는 것이 행복을 위한 인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사실 현실적인 개념을 이상적인 개념으로 일관할 수 없다는 그러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음을 기억하게 되는데 (각주1), 이것은 다수 또는 보편의 폭력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각주2) 그것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인권이라고 함도 보편적인 것은 사실이며 존중되어져야 하지만 상대적인 보편이라는 점에서는 상대적인 관계적 한정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과 그것에 따른 윤리적 판단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미 신학교수 현경교수님의 동성애 옹호적 발언에 대하여서 답변

현경교수님의 입장 인용 1.

"현경 교수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예수가 두벌 옷도 갖지 말라'고 했는데 전세계 모든 교회의 어떤 사람도 이를 지키지 못하고 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눠주라는 성경 말씀을 누가 지키고 있는가"라며 "만약 이런 걸 다 지키고 있다면 기독교인은 모두 '사회주의자'가 돼 있어야 할 것"이라고 성경 구절 가운데 동성애에 대한 것만 따라야 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임을 설명했다.

그는 또 "성경을 해석하는 권한이 지금까지 목사와 신학자에게만 있었지만 이젠 여러분에게 있다"며 "기독교의 가장 중심 메시지인 사랑과 정의와 자유라는 큰 틀 안에서 동성애, 이성애, 양성애 그 모든 것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말씀이 '환난이나 고난이나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구절인데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트렌스젠더나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큰 호응을 얻었다.

이번 행사 뒤, 발제를 맡은 김윤성 연구위원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는 것은 적어도 이젠 '동성애' 문제가 '그들만의 문제'를 넘어 모두 함께 고민하고 있다는 것 같다고 느꼈다"며 "이젠 단순히 기독교를 넘어 우리 사회의 중요한 부분인 다른 종교에까지 논의가 이뤄졌으면 한다"고 밝혔다.

참가자 이호준(20, 대학생)씨는 "평소 동성애 문제를 새롭게 봐야 한다고 생각해왔는데 현경 교수님 등의 강연을 통해 이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다"며 행사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답변 1.

현경교수님의 입장은 상당히 인위적인 편의주의적인 합리성을 따르고 있다 즉 일관성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의 부당성과 또한 전반적인 사랑과 같은 큰틀 즉 보편적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셨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해석의 문자적 해석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영적인 해석을 함이 옳은 것인가는 임의적으로 설정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위한 실재론적 기반이 있어야하는데 그것에 대하여서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이것은 이후에 반론이 있다면 받을 수있음을 밝혀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보편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문자적 해석을 한다고 할 때에 하나님의 절대 보편적 입장은 재고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서는 신학교수로서의 기본적인 실수라고 함을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절대라는 개념의 상대성을 말할 수 있겠지만 이것도 이후에 지적되어질 수 있는데 그 실재론을 거론할 수 있는 것은 그냥 맹목적인 사랑이라는 보편에서의 실재론을 찾은 것으로 볼 때에 이미 그러한 논의되어질 수 있는 실재론은 마음에 두지 않은 것으로 본다.

더욱 문자적개념과 같은 개체에 대한 해석을 달리 해야한다고하는 가운데서의 사랑과 같은 보편적 입장에서 접근을 말한다면 인권이라는 보편이라고 함이 많은 사람들의 인권이라는 보편과 상관관계에서 한정되어진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권의 주장에 있어서 소수라는 개념을 정당화하기에는 보편적 입장을 주장하기에는 너무 모순적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소수를 위해 보편을 말하고 있으면서 정작 상대적 보편들의 관계성이라고 하는 것의 보편과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보편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두지 않음은 여전히 임의적인 합리성의 전환밖에 되지 않는다.


현경교수님의 입장 인용 2.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내용도 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말씀이 '환난이나 고난이나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구절인데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트렌스젠더나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답변 2.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들이 사랑에 거할 수 있음을 인정하심에 대하여서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에 대하여서는 고치고자 하는 중심이 있지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연약함은 이해되어질 수 있어도 연약함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에 대한 계속적인 지속상태를 정당화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 고통가운데서도 원래의 성의 정체성을 되찾고 그 가운데서 비록 주의 뜻은 이해하지 못해도 그 고통가운데서 선하심을 말씀하실 수 있음과 그것의 정당함이 자존적으로 재가되어진 것임을 기억할 때에는 순종하는 중심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볼 때에 남성이 아닌 여성 또는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 판단되어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이라면 그것이 나의 본래의 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자존의 절대자의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그 고통의 사실 속에서도 타고난 본래의 성을 찾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평안함과 성의 기쁨이라는 나르시즘적인 자기 정체성의 사실보다도 자존의 절대자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 자신의 상대적인 모습속에서도 정당한 사실로 나타난다는 것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 옳은 것입니다.

같은 인간으로서는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없고 존중한다는 점에서의 표현으로써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못됨을 인정하나 하나님 앞에서의 그 증거로서는 분명하게 타고난 본래의 성을 지니고 되찾는 것이 옳은 것이며 그 고통속에서도 선하심의 사실을 기쁘게 받을 수 있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출판물에 대한 답변

1.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 신이 허락하고 인간이 금지한 사랑

답변 1

이미 동성에 대하여서 가증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바에 대하여서 여러가지 역사적 정황이라고 하는 것으로 비판하기에는 역부족하다는 것과 역사적 비평학적 접근을 했다고 했는데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Fact)이라는 것이 진정한 사실이냐는 것에 대하여서 여전히 회의적이라는 점에 대하여서 분명한 답변이 있는 가운데서 이야기 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역사적 예수라는 고증학적인 측면에서의 예수에 대한 재구성이라고 하는 것이 실패하였음은 역사적 사실이었음에 대한 것은 정설로 알려지고 있으며 역사비평학의 종말이라는 그러한 이론들도 나오고 있는 반면에 얼마나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하여서 답변되어질 수 없는 것임을 자초한 입장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이 동성애자들을 자살에서 막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의문시되어질 수도 있다. 그것은 사실에 대한 개념이 임의적이기 때문에 한시적인 생각이요 그것이 지나면 더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킬 수도 있다는 점이다. 참된 대안은 그러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합리성의 매료성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나르시즘적인 관점의 전환에서 자기 사랑의 사실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참된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이 우리의 삶의 상대적인 이해할 수 없는 가운데서도 합당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에 있음을 말할수 있습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동성애자들이 볼 때에 그들에 대한 편견이라는 것을 글을 쓰는 본인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 편견이라고 하는 것이 배척되어야 하는 당위성에서 비롯되어진 것이 아닌 상식이 기본되어진 생각의 여지로써 그리고 참다운 사실로써 말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신학과 철학에서는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하여서 불가지론적 개념을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합리성에서 정당성이 취하여진다는 개념으로써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의 부여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악한 세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인식에서 비롯되어지는 포스트모던적 개념에서의 탈 구조적 탈 보편적 입장을 말하기 위해 보편의 폭력이라는 것을 거론하며 소수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의파의 학설이 나서고 있는데 사실 정의라는 것의 정체성이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임의적 판단의 보편이해라고 하면 그 소수에게마저 폭력을 가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잔혹성을 가하게 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같은 인간으로서의 동성애자들과 트랜스젠더들의 고통과 고민과 그 어려움을 어떻게 다 이해하지 못하고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하는 것을 동의적 차원에서 규정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선하심은 우리인생의 고통이라고 하는 현상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전환적 개념에서의 정체성의 유혹을 벗어나서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뜻하심안에서 사실을 찾는 가운데서 더 큰 일들을 해내시는 참된 성도들로서 일반인들로서 삶의 의미의 기쁨이 있으시기를 위하여 기도하며 글을 맺습니다.












각주1) 안성찬, 이성과 감성, 유로서적
저자는 독일철학적 입장에 대한 사상에 대한 견해를 전반적으로 기술하고 포스트모던이즘적 개념의 탈구조주의적 개념에 대한 현실적인 비판을 하고 있는데 그의 본서 마지막 부분 '비판'이라는 부분을 주목할 수 있다.

이글을 쓰는 본인으로서는, 저자의 아펠의 철학의 변형과 그에 따른 수행적 모순을 벗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니체의 가상성과 그에 따라 생성되어진 보편에 저항하는 헤체라고 하는 것의 파괴성이라고 하는 것을 한정을 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변형되어진 하나의 한정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일뿐이며, 본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자존의 절대의 보편적 정당함에 따른 재가있는 판단적 사실이 비로소 수행적 모순이라는 판단과 다르면서도 비판의 여지를 가진 가운데서도 진정한 사실로 말하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2) 이러한 인권이라는 상대적으로 인정의 당위성을 가진 보편성의 개념에서의 주장의 전환적 모색을 행한다는 것은 한편 수긍되어지나 더 많은 사람들의 보편적 인권이라고 하는 것은 재고되어질 수 있어야 자신의 보편적 인권이라고 하는 것도 자리매김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보편의 폭력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주관적 보편으로 상대적인 보편에 대한 재고로써 전반적인 상대적인 생각의 보편성은 그 말하는 주관적 보편이 한정되어질 필요성이 있다는 것에 더욱 합리적인 판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신적인 재가라는 개념의 절대보편적 정당함을 얻는다면 그것은 앞서 말한 것에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게 되지만 그러나 트랜스젠더와 동성이라는 개념은 절대의 보편적 재가와는 상관성을 말할 수도 없고 재가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의 생각에서는 동정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지만 그 존재적 정당함에 대한 행보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꼬리말

대법원 판결에 대한 개인적인 입장

성전환에 대한 법률적 허용과 그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보조적인 가이드라인을 엄격하게 만든다고 하고 있는데 그것은 옳지 못하다고 본다. 법을 신설함에 있어서 법의 심리에 있어서 이미 인권의 보편성에 대한 재고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개정되어야 할 법이라고 본다

그러면서도 준비되어진 가운데서의 법적 입장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엄격한 기준이라는 데드라인을 만들기 보다는 정규법적인 제도로서의 우선적인 법적 조항보다는 한 판례나 어떤 규례정도로 법적 최소한의 실효의 당위성을 세우는 것이 최선이라고 본다. 그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인권이라고 함이 소수의 개념도 존중하지만 일반인들의 다수의 행복권과의 상관성에서 규정되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는 법적인 조항의 신설이 중요하다고 본다.

기성세대의 소수적 입장을 존중한다고 다음 세대의 성인식의 혼란이라고 하는 것을 무시할 수 있는 조항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함의 한 예만 들어둔다.

그 혼란이라는 것은 분별력이 없는 자들의 임의적인 호기심적인 개념과 절제하지 못하는 욕망적 개념이 어떤 당위성이 있는 법적 정당함을 임의적으로 합당하지 못하게 빌려올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서 법조계는 사회적으로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그 오고 오는 우리 후손들의 인식의 일반정체성에 임의적 고통을 부른 것에 대한 보편적 당위성을 기억하지 못함에 대하여서 다시 계속해서 판단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몇대의 신앙의 가정과 신앙생활을 한 성도로서의 동성애적 입장과 트랜스젠더의 입장을 취하시는 분에게

신앙에 있어서 그 연륜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귀하고 큰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비로소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자존의 절대자의 그 정당한 말씀이 상대적인 형식의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해서 상대적인 측면의 어떤 정도의 당위성을 가지고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트랜스젠더는 질병이다라는 견해에 대하여서

몸의 이상이 있다는 것이 항상 질병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며 현실적으로도 아무리 건강에 자부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여도 진료를 받으면 어느 정도는 이상으로 진단을 받을 수 있다고 볼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트랜스젠더적인 개념의 어떤 의미와 인식을 느낀다고 하는 것이 꼭 질병으로 규정하고 그것에 대한 대안을 생물학적으로 만족(?)시키는 방향을 추구하거나 권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트랜스젠더적인 행보를 생각하시는 분에게

몸의 성장으로서의 이상적 입장이 간혹 사람마다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사춘기에 호르몬 분비는 개인적인 차이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시적일 수도 있는 그러한 것을 단정지어서 성급한 동성애자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며 적극적인 상담과 노력을 친지를 비롯한 주위 사람과 힘써서 극복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리고 트랜스젠더로서의 임의적이고 개인적으로써의 기쁨도 있지만 호르몬 조절을 위한 의료행위적 입장을 항상 염두에 둔다는 것과 지금까지의 생활의 여러가지 정황에서 있게 되어지는 기득권에 대한 극복은 그렇게 기쁨만으로 이야기 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동성애적인 그러한 기쁨을 만족하기 위해 고통도 같이 재고해야 한다는 것과 그에 비해서는 동성애적인 것을 극복하기 위한 고통도 있고 또 보람도 말할 수 있는 것을 기억할 때에 임의적인 단순한 선택은 지향하는 것이 옳은 것이며, 그리고 상식적인 면에서도 추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런 트랜스젠더적인 행보는 하나님앞에서 분명 잘못입니다.

트랜스젠더는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가에 대하여서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으로 그러한 경향과 그러한 모습을 버리고 본래의 타고난 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지니고 되찾는 중심과 그러한 삶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가운데서 고통이 있더라도 옳다는 중심과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서 지속적인 신앙생활과 교회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좀더 토론을 원하시는 분

저의 홈페이지에서 카페로 오셔서 대화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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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5월 12, 2005

기독교를 안믿음 정말 지옥갈까요?

[질문]기독교를 안믿음 정말 지옥갈까요?

이루릴님 작성(2005-05-03 14:29:26)

기독교 교리중에서
그 종교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자나요,,,

그 종교를 믿지 않으면
진짜 지옥에 갈까요?



[답변] 사실입니다.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지옥갑니다. 라는 것에 대한 사실여부를 물으셨군요..

사실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참되다는 것이 주관적이지 않으냐는 판단에서 사실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되어지지만 그것은 그 하나님에 대하여서 잘 판단하고 난 다음에 그러한 질문의 당위성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자존하신다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누구의 지지를 받는 미숙한 또는 등떠밀리는 그러한 신이 아니라 참된 신이신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은 절대성과 합당성을 스스로 취하시는 분입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에 있어서 자신의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으로 말씀하심에 있어서 상대적인 것으로만 판단한다는 것은 그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냥 어떻게 아느냐는 식의 비아냥하는 그러한 것이 답변으로 일관할 수 없다는 것은 인지상정적으로도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저의 해석이라고 함과 말함에 일말의 여지가 있다고 하면 저의 말에 나타나는 그 하나님은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취하신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해석 중에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그 해석이 해석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을 때에 상대적으로만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식의 반문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상실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comment : 질문의 여지는 기독교를 안믿음 정말 지옥에 갈까에 대한 사실여부입니다. 이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말씀하실 때에 그것은 상대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그러한 진정한 사실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상식적으로도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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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주일 성수란 성경 적인가요?

[질문] 주일 성수란 성경 적인가요?
j61124님 작성 (2005-05-12 01:17:53)

율법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셨으니 율법에 하나였던 안식일도 이루어 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주님이 부활한 일요일 에배당가서 예배하면 가끔은 봉사도하고 하는 것이 과연 주일 성수인가요? 인간이 하나님의 날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까?



[답변] 주일성수에 대한 몇가지 언급으로

*안식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에 대해서..*

안식행위라는 개념을 다시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안식의 사실, 진정한 안식은 어디서 얻으며 그것이 진정한 사실인가를 확신할 수 있을 때에 그러한 것을 위한 안식이라는 행위적 개념은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안식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증거로 스스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사실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시는 정당한 인식이 가능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안식이 있다는 증거함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에 예배하며 기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그러한 인식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행위적 차원에서 믿음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으로 언젠가 그러한 것의 실제적인 것이 있을 것을 믿음으로 소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그들의 믿음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 안에서 그 합당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섭리하심이 역사적으로 나타나실 때가 참에 있어서 뜻하심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 성경적이라는 말에 대하여서*

말씀하신 분이 어떤 측면에서 성경적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말씀하셨는지는 다음에 언급하더라도 성경의 글자적 언급의 신실성이라는 측면을 생각함에 앞서는 것은 예수님의 뜻하심 안에서 타당성을 가지는 가운데서의 문자적 연결성을 생각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 주일 성수로서 예배당 출석과의 관련성에 대하여서*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 받게 될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자로서 구원의 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주일 성수라는 개념은 주일을 거룩히 지킨다는 개념인데 그러한 것은 주일을 기념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보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 안에서 진정으로 안식의 진정한 사실이 있으며 나를 주 예수께서 구원하셨습니다. 라는 고백으로 예배당 출석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26장에 나타나고 있는 야곱이 돌배개 배고 잘 때에 꿈으로 나타난 계시에서 사다리를 보게 되고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께 서원을 하는데 아버지 집에 무사히 돌아가게 하시면 소득에 십분의 일을 드리고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라는 서원이었습니다.

이러한 서원이라고 함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언약의 백성들로서, 예수님 안에서 진정으로 새 언약의 사람들로서, 서원을 이행하는 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이미 구원받았으므로 이러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아 무사히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 그래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립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십니다. 나는 예수님이 새우신 새언약의 백성입니다." 라는 신앙 고백이 예배당 출석행위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당이 천국과 동일하다거나 또는 어떤 지역으로서 국한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돌을 취하여서 믿음으로 구별하였듯이 믿음으로 한 예배처소를 구별하여 주께 드리고 그곳에서 그러한 주 앞에서의 구원받았음의 고백과 증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당은 믿음으로 예배처소로 구별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어떤 한정된 곳만 말하고 있는 것은 잘못입니다.)


즉 예배당 출석은 가야하는가 하는 그러한 의미로 그 당위성을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구원받은 자로서의 구원의 하나님을 높이는 신앙고백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인터넷과 같은 매체들이 있다고 하여서 주일성수로써 예배당 출석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 인간이 하나님의 날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까?*

상당히 경건한 자로서 질문하실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재가 즉 인정을 받은 자라면 그 지킴에는 너무나 합당함을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예수님 안에서 진정으로 받으신 주의 성도들은 그 믿음으로 하는 것이 비록 상대적이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의 허락이라고 함이 주어지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 주일을 거룩히 여기고 구원하심에 대한 증거적인 삶의 고백이 진정으로 받으신바 된다고 함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개인적으로..*

주일 성수를 행하심에 그냥 출석함도 귀하지만 하나님이 구원하셨음에 대한 증거의 행위로서 그 고백적인 행위로서 행함임을 기억하시고 주일성수를 기본으로 해서 신앙생활을 잘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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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1월 20, 2005

왜 오늘날 우리는 안식일(토요일)이 아닌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까?

[질문입니다]왜 오늘날 우리는 안식일(토요일)이 아닌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까?

전 장로교 청년입니다. 간단히 왜 우리는 지금의 주일을 지키고 있나요? 4계명에 하나님께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하셨는데 어째서 우리는 지금의 주일을 지키고 있나요? 보통 이런 질문을 하면 예수님의 부활에 관련해서 많이들 말씀해주시더군요 하지만 의문은 쉽게 풀리지가 않는군요 누구 잘알고 계신분 있으면 도움바랍니다 (성경구절,변경시기,배경 등 자세히 알고싶습니다)

God love all of you..


[답변]안식일이 아닌 주일을 지키는 것이 옳습니다.

안식교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것이 사활이 걸린 것과 같이 생각되어질 수 있고 그러한 사활적인 합리성의 충족성이라고 하는 것을 힘쓰는 가운데 그러한 인식들에 대하여서 당위성을 부여해 주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그러한 생각이 들 수도 있는 것이 현실적인 측면에서 취할 수 있는 입장이 됩니다.

질문하신 분의 입장에서는 장로교인이라고 하셨는데 장로교에서는 부활의 실제적 의미에서 주일을 지킨다는 말을 함에 있어서 합리적 충족성을 못느끼는 입장이군요.. 그리고 그러한 합리적 충족성이라고 하는 것을 좀더 충족시켜줄 수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느끼고 그러한 것에 안식교인들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도 비록 개연적이면서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러한 입장을 취하시는 것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비밀 고민 상담에서 글을 쓰면서 합리성의 충족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실제의식을 가지는 것과 기독교의 실제의식은 다르다는 점을 언급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무엇이 실재인가 그리고 그러한 실재에서 파생되어질 수 있는 정당함에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합리성을 갖춘 실제인가 그것을 먼저 분별함이 님의 상대적 합리성의 충족성에서 비롯단 당위성에서의 납득을 취하는 입장을 앞선다고 함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독교의 실재는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막연한 상대적 합리성으로부터 성경의 언급이라고 하는 일차적 자료들의 조합이라고 하는 것을 인위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입장에서 그 완성을 말한다면 합리성 자체의 자기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가정이 실제인 것같이 인위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실제는 하나님의 자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의 자기 정당함을 절대로 취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판단하는 여러가지 개연성의 합리성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즉 절대의 자기 정당함을 가지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 보편 상대적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성경의 일차적 자료의 조합과 관계성이라고 하는 것에서는 그 자체만으로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비판이 충분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절대 정당함으로 절대의 능력으로 상대적인 표현을 하신다면 그것은 그 상대적인 것은 상대적이면서도 상대적인 판단을 본질적으로 받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의 증거의 기본적인 실제의식의 중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하나님이 자기 주권적 정당함으로 우리의 허물을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살아나신 것에서 실존의 정당함이 실제적으로 규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실존의 정당한 이유라고 하는 것이 옳다 의롭다고 하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부활하심에서 안식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안식이라는 시간의 보편성에서 그 질서적 개념의 토요일 보다도 더 실제의식을 가질 수 있고 다시 그 질서적 새로운 질서적 의식의 실제를 말할 때에는 주일이 진정한 안식의 실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이러한 주님의 부활하심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여자적인 글자 그대로의 시간의 보편성에 따른 질서만 생각하고 있는 가운데 주님의 부활하심의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는 자들로서 소위 안식교의 가르침은 그 의로움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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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이 논리적인가요.. 아닙니다.!!

[질문]휴...다들 첨에 겪는 고민 같습니다....답변좀 부탁드려요

한창..열시미 잘 믿으려하는중인 기독교인입니다. 우연히 찬양을 찾던중. 진화론과 창조론이란 카페에 들어가게 돼었습니다. 거기서 창조론과 성경을 논리적으로 부정하려는 글들을 읽었고.. 심지어..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이 어떻게 아냐는 글까지 읽었답니다.T.T

저는..당연히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 글들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그 글에 반박할수 없는 제 무지가 너무 싫습니다. 성경을 읽고 싶어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잘 읽지 못했습니다.

물론 상대안하면 된다고 하시겠지만.. 제 성격상 그러질 못합니다.T.T 머라고 꼭 반박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눈..--;;;; 오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며 마니 울었는데.. 그냥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비웃고 욕하는 그들... 근데 단 한마디도 할수 없는 나.... 그래서..여기 계신분들께 질문드립니다. 제 물음에 비교적 논리적인 답변좀 부탁드립니다.


1. 성경에 나온 사실들은 100프로 사실인가요???
저도 한때 이런 생각을 한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나라의 단군설화처럼 이스라엘민족의 신화가 아닐까..... 왜냐면 제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읽어본 결과가 너무 이스라엘 민족 중심이었습니다. 아직 성경을 다 안읽어본터라 그러니 어이없는 질문이라도 이해해주세요^^;; 그냥..어느정도의 역사적 사실에 과장이 섞인건 아닌지...

2. 그 카페에서 말하길...
다윗과 솔로몬제국은 역사속에 존재하지 않거나 과장된 얘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무의 나이테가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가 일어난 시기보다 훨씬 오래된 나무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하나님은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기록되어졌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도 인간에 의해 기록되어진만큼.... 무언가 오류가 발견?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 이런 저를 잘 설명해주세요..^^;

3.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 내용에 대해...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가장 불만이 많은거 같습니다. 그들이 말하길.전지전능의 하나님이 자기자식들을 똑같이 사랑하지 않고.. 믿지 않는단 이유로 지옥에 보내느냐는 겁니다. 저는 만약 하나님의 존재를 몰랐던.. 아주 오랜 시대의 선인들도 지옥에 가야하는건지??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님과 같은......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롭고 좋으신분인데..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말 지옥에 가는게 맞는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서요....

4.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것을 예언한 구절이...구약에 어디에 있을까요?? 메시야가 올것이라는 것은 예언되어있지만.. 그게 예수님이라는걸 어떻게 아냐고.....(제 생각이 절대 아닙니다..!!) 그냥 인간들이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고 싶어서 믿는게 아니냐고.... 이 질문에는 제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요????

아무래도 저한테 온 첫번? 시험 같습니다.T.T 왜 그런 이상한 사이트에는 들어가가지고... 저는 머리는 나쁜데..은근히 논리적이걸 따진답니다. 저는 하나님을 알게되서 너무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분이 함께하심이.... 근데 저 위에 의문점들을 논리적으로 따질수 없으니.. 너무 답답합니다. 물론 주님의 그 심오한 뜻을 논리적으로 설명할수 없다는건 잘 알지만.. 그냥 답답합니다.. 저에게 지혜로운 답변 부탁드립니다


[답변]진화론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진화론에서 말하는 것은 이미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논리적인 것같이 자기 기만적인 합리성일 뿐입니다. 진화론이라고 함과 창조론에 대한 것을 말함에 있어서는 그 진화론의 인식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이미 비판되어진다는 점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즉 진화라는 개념과 창조라는 개념.. 이 둘은 공통적으로 역사라는 개념으로 증거적인 합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실제적으로 판단하는가에 따라서 이미 그 진화론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적인 논리를 가지지 못함에 대하여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실제적인 논리라고 함을 말하지 못하는 기만적 합리성에서 전반적으로 부정함을 말합니다.


1. 성경에 나오는 사실들은 100% 사실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서..

이미 100%라는 말을 한다는 것이 이미 상대적인 판단으로서 사실적인 완성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되어야 할 것은 사실이라는 개념입니다. 무엇이 사실인가 그것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태이해가 되어야 하는데.. 무엇이 객관이냐고 할 때에 진화론적 입장에서의 역사이해는 주관적 역사이해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사실은 인식적인 개념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써 진정한 객관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 객관적인 사태라는 것으로 말할 때에 상대적인 사태이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그 사태라는 실제의 확실성의 존재를 확신할 수 없습니다. 즉 이것은 불가지론과 관련되어지는데 진화론에서는 그래도 사람들의 납득되어지는 승인되는 가운데서의 상대적 객관이라는 그러한 기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존의 절대자로부터 절대의 정당함을 가지고 그 사태의 실존을 말하기 때문에 절대자가 상대적인 사태의 형식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으며 또한 말씀하신다는 점에서 형태적인 측면에서의 상대적 객관이면서도 절대의 객관을 말할 수 있고 절대의 사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100%의 사실로 말한다는 상대적 기술의 완성을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참된 사실로서의 증거임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다윗과 솔로몬제국은 역사속에 존재하지 않거나 과장된 얘기라고 합니다.

이것은 역사의 주관적 이해 즉 시간이해에 있어서 현대적인 사상에서 입각하고 있고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 종국적인 측면에서 즉 철학적 종말론에 입각한 가운데서 미래가 현재를 규정하는 형식으로써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합목적적인 시간관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합목적적인 측면 때문에 역사라는 것 특히 모세오경을 비롯하여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 역사서에 나오는 다윗과 솔로몬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 바벨론 포로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치적인 측면에서 그 나라의 정당성을 세우기 위한 즉 정치적 용어로써 '크레덴다'적인 측면에서 그 나라의 당위성을 말하기 위한 합목적적인 측면에서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이해에 있어서 미래가 현재와 과거의 실존을 규정할 수 있다는 그러한 전제적 이해라고 하는 것이 그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정당한 기준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역사이해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시간관이라고 하는 것과 실재의식은 귀납적인 개념에서 실제규명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실제의식을 말하며 그 정당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간관과 인식이라고 함의 실존적 정당함의 시비가 모든 합리성의 논의를 앞선다는 개념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잘못된 합리성의 귀결적 표현일 뿐입니다.

3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에 대한 반발에 대하여서..

사실 지옥이라고 함의 언어적 실체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그들은 또한 상대적 상상에 대한 것으로 자신들의 정당함 자신들의 존재의 개연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은 여자적 해석을 함에 있어서도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비합리성적인 불분명함까지도 실제적 증거로서 나타난다고 할 때에 여자적 분석이라고 함의 자리에 머물수밖에 없는 자들의 고민은 자신들의 정당화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4.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것을 예언한 구절이...구약에 어디에 있을까요?? 메시야가 올것이라는 것은 예언되어있지만.. 그게 예수님이라는걸 어떻게 아냐고.....(제 생각이 절대 아닙니다..!!)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예언한 구절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을 묻는 것을 앞서는 것은 그 예언적 실존이라고 함을 분별할 수 있는 실제의식이 그들에게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먼저 답변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합리적인 언급은 있지만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에 따른 합리성에 비견되어질 절대의 정당함은 그들 상대적 실재분별함에 있어서는 없다는 것을 지적해두겠습니다.

즉 예언의 실존을 묻기 전에 예언의 실존을 분별할 수 있는 실제의식과 기준은 그들이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 기본적인 답변을 해두겠습니다.


이명신
단적으로 진화론이라고 하는 것이 합리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실제적인 의미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는 기회가 있다면 다시 논의하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합리성.. 그 자체만을 생각하심에 힘들어하시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17: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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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죽음으로부터.. 그리고 연옥에 대한 소망에 대하여서..

[고민] 삶과 죽음, 천국과 지옥에 대한 고뇌..

저는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영접한지 13년 정도 된 개신교 신자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관한 의문점에 대해 문의하고 싶어서 이곳에서 글을 남깁니다. 성경에 대해 많이 알고계신 독실한 크리스챤이거나, 목회에 관련된 분들께서는 부디 답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저는 현재 28살의 남자이고 아직 늦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중학교 때부터(그이전에는 성당에 다니기도 했죠)했습니다. 나름대로 학생회 시절에는 교회생활도 열씨미 했던 제가, 군대에 다녀오고나서는 신앙적으로 식은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3년전인 2001년에 저의 할머니께서 급작스럽게 돌아가시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죠. 군제대후 신앙적으로 식은 상태였지만, 조모의 죽음은 저에게 신앙적으로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생전에 교회에 가자고 제가 말씀드리면 "마음으로만 믿는다"라고 하는, 카톨릭 교회에 다니신 적이 있는 분이셨고, 저는 할머니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는 확신이 안들었었죠.

여기서 저는, "생전에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죄한번 제대로 짓지 않은, 죄가 있다면 자손들 사랑한 죄밖에 없는 할머니가, 과연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옥에 가는 것이 합당한가"라는 심한 고뇌를 하게 됐습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아담과 하와 이후로 태어날때부터"원죄"를 갖고, 예수를 통해서만이 이 죄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이죠. 그런데, 할머니의 죽음을 지켜보기전까지는 이런 문제들이 나와는 관련이 없어서 "그냥 그러나보다"하고 생각하고 넘겼던 것이 점점 불합리하게 보이기 시작하게 되더군요. "과연 예수를 전혀 알 방법이 없는 오지의 미개인들과, 또 예수교가 전해지기 전의 우리 조상들도 다 지옥에 가야 한단 말인가"라는 의문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저 나름대로 "예수천당은 믿지만 불신지옥은 믿지 않는다"라는, 엄격한 기독교인이 봤을때는 다소 사이비같은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심한 고뇌를 하면서, 이곳저곳 목사님들에게 메일로 상담도 받아보고, 또 직접 대면해서 상담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같은 기독교 장로회 목사님들에게 들은 답변도 의외로 그 내용은 목사님마다 다양한 것들이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신앙적으로 무척 힘드신가 보군요. 중요한 것은 지금 고뇌하는것 보다는 열씨미 신앙생활하고 살아가는것이 고인의 뜻,그리고 주님의 뜻과 합치될 것이 아닐까요. 분명 할머니께서는 좋은 곳에 가셨을 것입니다"라고 하셨고, 또 어떤 목사님은 "기독교의 신앙은 천국과 지옥이 있을뿐, 중간은 없습니다. 그 결정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우리들은 그 축복의 결정을 감사할 수 있을뿐, 안타깝지만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어쩔 수는 없는 것이랍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기독교에서의 죽음은 절대로 "천국과 지옥"만이 있다는 것일까요? 정말 모호하게, 어떤 목사님은 "인간으로서 이해하고 해결할 수없는 것이 너무도 많다"고 하시며 여기에 대한 확답을 피하시기도 하고, 어떤 목사님은 단호하게 "천국과 지옥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하셔서, 저로써는 혼란스럽네요.

아니면 천주교의 연옥의 개념을 생각하는것이 합리적인 것일까요? 해석하기에 따라서 연옥도 지옥이라 할 수 있겠지만, 천주교쪽에서의 해석을 보면 예수를 모르더라도 대죄를 짓지 않는한 연옥에 가고, 연옥에서는 그래도 불의 연단을 통해 천국에 마땅한 영혼이 되면 결국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하던데.. 제가 어렸을때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의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할머니가, 정말 자식만을 아끼는데 평생을 바친 그분이 지옥에 가야만한다는 극단적 기독교의 교리를 받아들일수 없게 됐답니다.

.... 제 배경설명이 너무 장황했네요. 바라옵건데, 한국 기독교의 일반적인 교리로는 오로지 천국과 지옥만 있단 말인가, 그리고 예수님을 믿을래야 믿을수가 없었던 오지의 주민들과 우리 조상들은 어찌 되었단 말인가, 예수님을 확실히 믿는다는 생각이 안드는 정말 좋은 사람들도 지옥에 가야만 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한국 기독교의 일반적 교리로써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 많은 가르침 바랍니다. 무엇보다, 할머니를 제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가르쳐 주세요.. 장문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




[답변] 연옥에 대한 소망에 대하여서..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개신교 신자라고 말씀하심에 신실성을 받으면서.. 기독교 비판에 대한 입장에 대하여서도 재고할 필요 있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먼저 할머니의 죽음에 대하여서 그리고 그 사랑과 연민에 대한 것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세상에 착하다고 하는 그러한 모습은 우리 기독교인들 보다도 일반인에게서도 더 많이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합니다. 그러한 선함의 비교에서 우리의 신앙의 모습과 결과가 상관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중심의 생각이 아니라고 봅니다.

왜 하나님의 판단중심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것을 먼저 분명히 말씀드려야 하겠군요..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자존의 절대자가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인생을 만드시기를 기뻐하셨고 또한 구속하심에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은 절대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인 판단의 여지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상당한 의미와 실제를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자존의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는 것과 그 실제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크신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주관적인 입장에서 누구보다도 더 아름답고 그 사랑이 무한하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무한적인 개념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상대적인 무한적 개념이기 때문에 절대 하나님의 무한과 비교되어질 수 있고 상관성이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할머니의 죽음에서 비롯되어진 선의 상대적 차이라고 하는 개념에서의 죄악 문제는 중세적으로 부터 그리고 구교로부터 어거스틴의 사상적 입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거스틴은 죄라고 하는 것을 선의 결핍이라는 견해를 지지해왔습니다.

그러한 것은 구교에서 언급되어질 수 있고 그러한 기반에서 논해질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개신교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미종족의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을 알 수 없었던 사람들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경시되어지는 상대적 모순이라는 것에 상대적 답변이라고 하는 것의 완전성 상대적 충족성이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절대 자존의 정당함에 따른 구속이라고 하는 것이 평가되어지거나 또는 의문시되어지는 가운데서 새롭게 규정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무한이라는 개념에 정적인 의미로 정당함을 부여할 수 있다는 그러한 판단에서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가운데서는 결코 답변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른 것으로서의 구원이라고 함을 믿을 때에는 상대적 완전의 합리성의 구축여부에 이미 실제적인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적 합리성의 추구요구 자체가 이미 기각되어진 인식과 발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연옥의 소망에 대하여서..

이러한 자존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없고 여호와 하나님의 실재론적 입장에서의 정당함을 찾지 않는 구교적인 입장에서는 상대적 합리성의 추구라는 개념에 어느정도 답변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연옥이라고 하는 개념을 성경에서 찾아낸 것으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합리성에 대한 것은 여기서 전부 논한다는 개념은 적절하지 않고 메일로나 또는 저의 까페에서 아니면 여기 까페에서 달리 논의가 되어지면 그 때에 다시 재고할 수 있는 것으로 받음이 좋겠다고 생각이 됩니다.

다윗의 경우..

다윗도 자신의 아들이 죽음을 놓고 이미 죽은줄 모르고 행하는 가운데서 참으로 그의 고통이 심하였지만 그의 아들이 죽었음을 알고 그의 금식하던 자리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것과 같이 이제는 주님의 뜻하심 안에서 상대적인 이해의 충족성이라고 함의 실제를 말하지 않는 자리에 선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가운데서 다시 주의 뜻하심에 맡기고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의 회복이 있으시기를 축복하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 목사님들의 견해는 그 신학과 정체성에서 이미 답변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고 그러한 답변과는 달리 개인적인 입장이면서도 하나님의 절대 보편에 따른 합당함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증거의 한 표현으로써 이글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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