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확신과 회의에 대하여서..
질문(Anonymous)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도적으로 부정 한적이 있나요?
10년이상이나 사랑해 왔던 하나님의 사랑을 말입니다.
얼마전가지만해도 주님의 일이라면 자신의 시간을 쪼개어 봉사하던 청년이 갑자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자신의 믿음이 불확신 하다며 만약이라는 말과 함께 하나님의로 부터 의도적으로 멀어지고 있습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달란트로 봉사하던 청년이였기에 마음이 아프답니다.
자신은 모태 신앙이였기에 어머니의 믿음으로 인해 신앙 생활을 해왔노라며 자신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것인지 의문 스럽다고 하더군요.
또한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모습이 싫고 착하게 살아야하는 것이 싫다는것입니다.
그 청년의 가정은 아버지가 엄하시긴합니다.물론 아버지는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하였답니다.
그래서 사사건건 아버지와의 충돌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이럴땐 어떤 이야기로 그 마음을 돌이킬수 있을까요?
답변 신앙의 확신과 회의에 대하여서..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부인하게 되어지는 것이 자신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하는 것에 자신의 믿음이 불확신하다고 함이 그 이유이군요..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이유가 되지 않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며 생활해 옴에 대한 불확신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지 그것도 역시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확신할 수 없다고 하는 그러한 인식과 그러한 잘못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확실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질문해둡니다. 그것은 역시 확실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확실하다고 할 수도 있는 그러한 여러 합리성이 있지만 그러한 것들이 상대적이라고 할 때에 그 여지는 항상 남겨두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말입니다.
아 물론.. 이러한 입장을 취하시는 분의 입장은 바로 불가지론입니다. 즉 알 수 없다는 것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질문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 불가지론이 확실한가 그것입니다. 불가지론은 합리성은 있어도 자체적으로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기 때문에 회의적인 입장이라고 해서 그것이 항상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신앙의 확신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는 신앙의 경건이라는 맹목적인 신앙의 형태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태신앙적 입장에서는 한번쯤 다 경험하는 것이지요.. 아버지 어머니가 목사이고 장로이고 권사 집사이시니.. 나도 신앙생활을 잘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누가 어떠한 합리적인 말을 해도 맹목적으로 부인하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에 눈을 뜨면..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불가지론에 대한 입장에서 고민하는 것이 기본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그러한 입장에서는 두가지 즉 계속 맹목적으로 밀고 나가는 신앙을 말하든지 확신할 수 없다는 식으로 신앙에 지친 것에 회피적 입장을 취하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교파가 있습니다만 청교도적인 입장에서는 경건의 훈련에 대한 증거를 할 뿐 진정으로 그 증거의 실재적 가르침과 교훈에는 관심을 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젊은이들이 많이 고민하고 합리성에 맹목적 배타나 맹목적 추종이라는 훈련되어지지 않는 자들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지점에 오기도 합니다.
아 물론 청교도적인 입장의 선함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회의적인 불가지론에 대하여서 답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또한 다른 현대신학이나 또는 다른 교단들도 실재에 대한 눈을 감은 가운데서 답변못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우리 신앙의 확신이라고 하는 것이 합리적 불가지론으로 판단받음에 자체적인 비판정당함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확신은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의 정당함을 가지고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이 상대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할 때에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인 모습이라고 함으로 상대적인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상대적 표현을 상대적이라고 함에서 그 확실성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라는 반문을 한다고 할 때에 그 반분이라고 하는 합리성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문하게 되어지는 그 합리성의 실제적인 판단은 상대적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고 그 여지를 항상 남겨주어야 보편적인 생각이라는 그러한 점에서 전체로서의 지지를 받게 되어지는 확실한 실제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태적인 측면의 그러한 모습을 취한다고 하여도 절대자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면 그러한 판단은 절대자 앞에서 기각되어진다는 것입니다.
합리성만 있다고 그것이 설득력과 그에 따른 납득 당위성으로써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역시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역시 불가지론이라고 함이 상대적 판단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 합리성은 역시 자체적 정당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와 달리 자존의 하나님은 상대적 판단이라고 함의 영역과 상관없이 자존하시는 분으로써 자존의 절대자 자기의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 영역을 취하신다고 할 때에 상대적 비합리성이 있다고 하여도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면 그것은 합당한 합리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 인식에 대하여서
우리가 믿는 믿음과 그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한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그 믿음과 그 내용이라고 할 때에 빈약하다는 개념이나 달리 생각되어지고 심지어 비판되어질 수 있는 정황에 있다고 하여도 그러한 상대적 판단의 하에 본질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진짜 상대적이라고 함을 마음에 둔다면.. 절대자를 부인할 수 있다고 하면 그 부인된 절대자가 진짜 절대자이겠습니까..? 절대자를 부인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진짜 절대자를 생각하지 않는 정직하지 못한 자의 모습입니다.
물론 절대라는 개념을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다는 상대적 표현과 인식이 여러가지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하나님 신을 '무한자' 또는 '무제약자'라는 그러한 말을 하는 독일 철학자 피히테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동일철학자들의 입장에서 인정되어지는 신관이며 이러한 가운데서 비판되어지기도 하는데.. 사실 이미 신을 진정한 자존의 절대자로 생각하지 않는 정직하지 못한 가운데서의 비판과 그 합리성일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존의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는 상대적 판단이라고 함에 이미 메이지 않는 분이시면서도 상대적으로 자신을 자기의 정당함으로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자기 계시입니다.
신앙의 확신이라고 함에 어떻게 확신하느냐는 질문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이 상대적으로도 말씀하실 수 있고 그러한 상대적인 것으로도 실제의 신앙과 그 증거를 삼으신다는 것에 있습니다.
http://geocities.com/vosscare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도적으로 부정 한적이 있나요?
10년이상이나 사랑해 왔던 하나님의 사랑을 말입니다.
얼마전가지만해도 주님의 일이라면 자신의 시간을 쪼개어 봉사하던 청년이 갑자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자신의 믿음이 불확신 하다며 만약이라는 말과 함께 하나님의로 부터 의도적으로 멀어지고 있습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달란트로 봉사하던 청년이였기에 마음이 아프답니다.
자신은 모태 신앙이였기에 어머니의 믿음으로 인해 신앙 생활을 해왔노라며 자신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것인지 의문 스럽다고 하더군요.
또한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모습이 싫고 착하게 살아야하는 것이 싫다는것입니다.
그 청년의 가정은 아버지가 엄하시긴합니다.물론 아버지는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하였답니다.
그래서 사사건건 아버지와의 충돌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이럴땐 어떤 이야기로 그 마음을 돌이킬수 있을까요?
답변 신앙의 확신과 회의에 대하여서..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부인하게 되어지는 것이 자신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하는 것에 자신의 믿음이 불확신하다고 함이 그 이유이군요..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이유가 되지 않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며 생활해 옴에 대한 불확신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지 그것도 역시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확신할 수 없다고 하는 그러한 인식과 그러한 잘못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확실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질문해둡니다. 그것은 역시 확실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확실하다고 할 수도 있는 그러한 여러 합리성이 있지만 그러한 것들이 상대적이라고 할 때에 그 여지는 항상 남겨두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말입니다.
아 물론.. 이러한 입장을 취하시는 분의 입장은 바로 불가지론입니다. 즉 알 수 없다는 것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질문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 불가지론이 확실한가 그것입니다. 불가지론은 합리성은 있어도 자체적으로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기 때문에 회의적인 입장이라고 해서 그것이 항상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신앙의 확신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는 신앙의 경건이라는 맹목적인 신앙의 형태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태신앙적 입장에서는 한번쯤 다 경험하는 것이지요.. 아버지 어머니가 목사이고 장로이고 권사 집사이시니.. 나도 신앙생활을 잘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누가 어떠한 합리적인 말을 해도 맹목적으로 부인하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에 눈을 뜨면..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불가지론에 대한 입장에서 고민하는 것이 기본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그러한 입장에서는 두가지 즉 계속 맹목적으로 밀고 나가는 신앙을 말하든지 확신할 수 없다는 식으로 신앙에 지친 것에 회피적 입장을 취하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교파가 있습니다만 청교도적인 입장에서는 경건의 훈련에 대한 증거를 할 뿐 진정으로 그 증거의 실재적 가르침과 교훈에는 관심을 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젊은이들이 많이 고민하고 합리성에 맹목적 배타나 맹목적 추종이라는 훈련되어지지 않는 자들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지점에 오기도 합니다.
아 물론 청교도적인 입장의 선함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회의적인 불가지론에 대하여서 답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또한 다른 현대신학이나 또는 다른 교단들도 실재에 대한 눈을 감은 가운데서 답변못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우리 신앙의 확신이라고 하는 것이 합리적 불가지론으로 판단받음에 자체적인 비판정당함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확신은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의 정당함을 가지고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이 상대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할 때에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인 모습이라고 함으로 상대적인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상대적 표현을 상대적이라고 함에서 그 확실성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라는 반문을 한다고 할 때에 그 반분이라고 하는 합리성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문하게 되어지는 그 합리성의 실제적인 판단은 상대적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고 그 여지를 항상 남겨주어야 보편적인 생각이라는 그러한 점에서 전체로서의 지지를 받게 되어지는 확실한 실제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태적인 측면의 그러한 모습을 취한다고 하여도 절대자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면 그러한 판단은 절대자 앞에서 기각되어진다는 것입니다.
합리성만 있다고 그것이 설득력과 그에 따른 납득 당위성으로써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역시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역시 불가지론이라고 함이 상대적 판단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 합리성은 역시 자체적 정당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와 달리 자존의 하나님은 상대적 판단이라고 함의 영역과 상관없이 자존하시는 분으로써 자존의 절대자 자기의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 영역을 취하신다고 할 때에 상대적 비합리성이 있다고 하여도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면 그것은 합당한 합리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 인식에 대하여서
우리가 믿는 믿음과 그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한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그 믿음과 그 내용이라고 할 때에 빈약하다는 개념이나 달리 생각되어지고 심지어 비판되어질 수 있는 정황에 있다고 하여도 그러한 상대적 판단의 하에 본질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진짜 상대적이라고 함을 마음에 둔다면.. 절대자를 부인할 수 있다고 하면 그 부인된 절대자가 진짜 절대자이겠습니까..? 절대자를 부인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진짜 절대자를 생각하지 않는 정직하지 못한 자의 모습입니다.
물론 절대라는 개념을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다는 상대적 표현과 인식이 여러가지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하나님 신을 '무한자' 또는 '무제약자'라는 그러한 말을 하는 독일 철학자 피히테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동일철학자들의 입장에서 인정되어지는 신관이며 이러한 가운데서 비판되어지기도 하는데.. 사실 이미 신을 진정한 자존의 절대자로 생각하지 않는 정직하지 못한 가운데서의 비판과 그 합리성일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존의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는 상대적 판단이라고 함에 이미 메이지 않는 분이시면서도 상대적으로 자신을 자기의 정당함으로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자기 계시입니다.
신앙의 확신이라고 함에 어떻게 확신하느냐는 질문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이 상대적으로도 말씀하실 수 있고 그러한 상대적인 것으로도 실제의 신앙과 그 증거를 삼으신다는 것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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