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죽음으로부터.. 그리고 연옥에 대한 소망에 대하여서..
[고민] 삶과 죽음, 천국과 지옥에 대한 고뇌..
저는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영접한지 13년 정도 된 개신교 신자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관한 의문점에 대해 문의하고 싶어서 이곳에서 글을 남깁니다. 성경에 대해 많이 알고계신 독실한 크리스챤이거나, 목회에 관련된 분들께서는 부디 답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저는 현재 28살의 남자이고 아직 늦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중학교 때부터(그이전에는 성당에 다니기도 했죠)했습니다. 나름대로 학생회 시절에는 교회생활도 열씨미 했던 제가, 군대에 다녀오고나서는 신앙적으로 식은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3년전인 2001년에 저의 할머니께서 급작스럽게 돌아가시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죠. 군제대후 신앙적으로 식은 상태였지만, 조모의 죽음은 저에게 신앙적으로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생전에 교회에 가자고 제가 말씀드리면 "마음으로만 믿는다"라고 하는, 카톨릭 교회에 다니신 적이 있는 분이셨고, 저는 할머니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는 확신이 안들었었죠.
여기서 저는, "생전에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죄한번 제대로 짓지 않은, 죄가 있다면 자손들 사랑한 죄밖에 없는 할머니가, 과연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옥에 가는 것이 합당한가"라는 심한 고뇌를 하게 됐습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아담과 하와 이후로 태어날때부터"원죄"를 갖고, 예수를 통해서만이 이 죄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이죠. 그런데, 할머니의 죽음을 지켜보기전까지는 이런 문제들이 나와는 관련이 없어서 "그냥 그러나보다"하고 생각하고 넘겼던 것이 점점 불합리하게 보이기 시작하게 되더군요. "과연 예수를 전혀 알 방법이 없는 오지의 미개인들과, 또 예수교가 전해지기 전의 우리 조상들도 다 지옥에 가야 한단 말인가"라는 의문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저 나름대로 "예수천당은 믿지만 불신지옥은 믿지 않는다"라는, 엄격한 기독교인이 봤을때는 다소 사이비같은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심한 고뇌를 하면서, 이곳저곳 목사님들에게 메일로 상담도 받아보고, 또 직접 대면해서 상담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같은 기독교 장로회 목사님들에게 들은 답변도 의외로 그 내용은 목사님마다 다양한 것들이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신앙적으로 무척 힘드신가 보군요. 중요한 것은 지금 고뇌하는것 보다는 열씨미 신앙생활하고 살아가는것이 고인의 뜻,그리고 주님의 뜻과 합치될 것이 아닐까요. 분명 할머니께서는 좋은 곳에 가셨을 것입니다"라고 하셨고, 또 어떤 목사님은 "기독교의 신앙은 천국과 지옥이 있을뿐, 중간은 없습니다. 그 결정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우리들은 그 축복의 결정을 감사할 수 있을뿐, 안타깝지만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어쩔 수는 없는 것이랍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기독교에서의 죽음은 절대로 "천국과 지옥"만이 있다는 것일까요? 정말 모호하게, 어떤 목사님은 "인간으로서 이해하고 해결할 수없는 것이 너무도 많다"고 하시며 여기에 대한 확답을 피하시기도 하고, 어떤 목사님은 단호하게 "천국과 지옥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하셔서, 저로써는 혼란스럽네요.
아니면 천주교의 연옥의 개념을 생각하는것이 합리적인 것일까요? 해석하기에 따라서 연옥도 지옥이라 할 수 있겠지만, 천주교쪽에서의 해석을 보면 예수를 모르더라도 대죄를 짓지 않는한 연옥에 가고, 연옥에서는 그래도 불의 연단을 통해 천국에 마땅한 영혼이 되면 결국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하던데.. 제가 어렸을때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의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할머니가, 정말 자식만을 아끼는데 평생을 바친 그분이 지옥에 가야만한다는 극단적 기독교의 교리를 받아들일수 없게 됐답니다.
.... 제 배경설명이 너무 장황했네요. 바라옵건데, 한국 기독교의 일반적인 교리로는 오로지 천국과 지옥만 있단 말인가, 그리고 예수님을 믿을래야 믿을수가 없었던 오지의 주민들과 우리 조상들은 어찌 되었단 말인가, 예수님을 확실히 믿는다는 생각이 안드는 정말 좋은 사람들도 지옥에 가야만 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한국 기독교의 일반적 교리로써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 많은 가르침 바랍니다. 무엇보다, 할머니를 제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가르쳐 주세요.. 장문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
[답변] 연옥에 대한 소망에 대하여서..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개신교 신자라고 말씀하심에 신실성을 받으면서.. 기독교 비판에 대한 입장에 대하여서도 재고할 필요 있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먼저 할머니의 죽음에 대하여서 그리고 그 사랑과 연민에 대한 것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세상에 착하다고 하는 그러한 모습은 우리 기독교인들 보다도 일반인에게서도 더 많이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합니다. 그러한 선함의 비교에서 우리의 신앙의 모습과 결과가 상관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중심의 생각이 아니라고 봅니다.
왜 하나님의 판단중심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것을 먼저 분명히 말씀드려야 하겠군요..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자존의 절대자가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인생을 만드시기를 기뻐하셨고 또한 구속하심에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은 절대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인 판단의 여지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상당한 의미와 실제를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자존의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는 것과 그 실제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크신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주관적인 입장에서 누구보다도 더 아름답고 그 사랑이 무한하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무한적인 개념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상대적인 무한적 개념이기 때문에 절대 하나님의 무한과 비교되어질 수 있고 상관성이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할머니의 죽음에서 비롯되어진 선의 상대적 차이라고 하는 개념에서의 죄악 문제는 중세적으로 부터 그리고 구교로부터 어거스틴의 사상적 입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거스틴은 죄라고 하는 것을 선의 결핍이라는 견해를 지지해왔습니다.
그러한 것은 구교에서 언급되어질 수 있고 그러한 기반에서 논해질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개신교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미종족의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을 알 수 없었던 사람들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경시되어지는 상대적 모순이라는 것에 상대적 답변이라고 하는 것의 완전성 상대적 충족성이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절대 자존의 정당함에 따른 구속이라고 하는 것이 평가되어지거나 또는 의문시되어지는 가운데서 새롭게 규정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무한이라는 개념에 정적인 의미로 정당함을 부여할 수 있다는 그러한 판단에서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가운데서는 결코 답변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른 것으로서의 구원이라고 함을 믿을 때에는 상대적 완전의 합리성의 구축여부에 이미 실제적인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적 합리성의 추구요구 자체가 이미 기각되어진 인식과 발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연옥의 소망에 대하여서..
이러한 자존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없고 여호와 하나님의 실재론적 입장에서의 정당함을 찾지 않는 구교적인 입장에서는 상대적 합리성의 추구라는 개념에 어느정도 답변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연옥이라고 하는 개념을 성경에서 찾아낸 것으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합리성에 대한 것은 여기서 전부 논한다는 개념은 적절하지 않고 메일로나 또는 저의 까페에서 아니면 여기 까페에서 달리 논의가 되어지면 그 때에 다시 재고할 수 있는 것으로 받음이 좋겠다고 생각이 됩니다.
다윗의 경우..
다윗도 자신의 아들이 죽음을 놓고 이미 죽은줄 모르고 행하는 가운데서 참으로 그의 고통이 심하였지만 그의 아들이 죽었음을 알고 그의 금식하던 자리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것과 같이 이제는 주님의 뜻하심 안에서 상대적인 이해의 충족성이라고 함의 실제를 말하지 않는 자리에 선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가운데서 다시 주의 뜻하심에 맡기고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의 회복이 있으시기를 축복하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 목사님들의 견해는 그 신학과 정체성에서 이미 답변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고 그러한 답변과는 달리 개인적인 입장이면서도 하나님의 절대 보편에 따른 합당함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증거의 한 표현으로써 이글을 남깁니다.
http://geocities.com/vosscare
저는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영접한지 13년 정도 된 개신교 신자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관한 의문점에 대해 문의하고 싶어서 이곳에서 글을 남깁니다. 성경에 대해 많이 알고계신 독실한 크리스챤이거나, 목회에 관련된 분들께서는 부디 답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저는 현재 28살의 남자이고 아직 늦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중학교 때부터(그이전에는 성당에 다니기도 했죠)했습니다. 나름대로 학생회 시절에는 교회생활도 열씨미 했던 제가, 군대에 다녀오고나서는 신앙적으로 식은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3년전인 2001년에 저의 할머니께서 급작스럽게 돌아가시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죠. 군제대후 신앙적으로 식은 상태였지만, 조모의 죽음은 저에게 신앙적으로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생전에 교회에 가자고 제가 말씀드리면 "마음으로만 믿는다"라고 하는, 카톨릭 교회에 다니신 적이 있는 분이셨고, 저는 할머니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는 확신이 안들었었죠.
여기서 저는, "생전에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죄한번 제대로 짓지 않은, 죄가 있다면 자손들 사랑한 죄밖에 없는 할머니가, 과연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옥에 가는 것이 합당한가"라는 심한 고뇌를 하게 됐습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아담과 하와 이후로 태어날때부터"원죄"를 갖고, 예수를 통해서만이 이 죄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이죠. 그런데, 할머니의 죽음을 지켜보기전까지는 이런 문제들이 나와는 관련이 없어서 "그냥 그러나보다"하고 생각하고 넘겼던 것이 점점 불합리하게 보이기 시작하게 되더군요. "과연 예수를 전혀 알 방법이 없는 오지의 미개인들과, 또 예수교가 전해지기 전의 우리 조상들도 다 지옥에 가야 한단 말인가"라는 의문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저 나름대로 "예수천당은 믿지만 불신지옥은 믿지 않는다"라는, 엄격한 기독교인이 봤을때는 다소 사이비같은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심한 고뇌를 하면서, 이곳저곳 목사님들에게 메일로 상담도 받아보고, 또 직접 대면해서 상담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같은 기독교 장로회 목사님들에게 들은 답변도 의외로 그 내용은 목사님마다 다양한 것들이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신앙적으로 무척 힘드신가 보군요. 중요한 것은 지금 고뇌하는것 보다는 열씨미 신앙생활하고 살아가는것이 고인의 뜻,그리고 주님의 뜻과 합치될 것이 아닐까요. 분명 할머니께서는 좋은 곳에 가셨을 것입니다"라고 하셨고, 또 어떤 목사님은 "기독교의 신앙은 천국과 지옥이 있을뿐, 중간은 없습니다. 그 결정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우리들은 그 축복의 결정을 감사할 수 있을뿐, 안타깝지만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어쩔 수는 없는 것이랍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기독교에서의 죽음은 절대로 "천국과 지옥"만이 있다는 것일까요? 정말 모호하게, 어떤 목사님은 "인간으로서 이해하고 해결할 수없는 것이 너무도 많다"고 하시며 여기에 대한 확답을 피하시기도 하고, 어떤 목사님은 단호하게 "천국과 지옥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하셔서, 저로써는 혼란스럽네요.
아니면 천주교의 연옥의 개념을 생각하는것이 합리적인 것일까요? 해석하기에 따라서 연옥도 지옥이라 할 수 있겠지만, 천주교쪽에서의 해석을 보면 예수를 모르더라도 대죄를 짓지 않는한 연옥에 가고, 연옥에서는 그래도 불의 연단을 통해 천국에 마땅한 영혼이 되면 결국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하던데.. 제가 어렸을때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의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할머니가, 정말 자식만을 아끼는데 평생을 바친 그분이 지옥에 가야만한다는 극단적 기독교의 교리를 받아들일수 없게 됐답니다.
.... 제 배경설명이 너무 장황했네요. 바라옵건데, 한국 기독교의 일반적인 교리로는 오로지 천국과 지옥만 있단 말인가, 그리고 예수님을 믿을래야 믿을수가 없었던 오지의 주민들과 우리 조상들은 어찌 되었단 말인가, 예수님을 확실히 믿는다는 생각이 안드는 정말 좋은 사람들도 지옥에 가야만 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한국 기독교의 일반적 교리로써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 많은 가르침 바랍니다. 무엇보다, 할머니를 제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가르쳐 주세요.. 장문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
[답변] 연옥에 대한 소망에 대하여서..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개신교 신자라고 말씀하심에 신실성을 받으면서.. 기독교 비판에 대한 입장에 대하여서도 재고할 필요 있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먼저 할머니의 죽음에 대하여서 그리고 그 사랑과 연민에 대한 것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세상에 착하다고 하는 그러한 모습은 우리 기독교인들 보다도 일반인에게서도 더 많이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합니다. 그러한 선함의 비교에서 우리의 신앙의 모습과 결과가 상관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중심의 생각이 아니라고 봅니다.
왜 하나님의 판단중심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것을 먼저 분명히 말씀드려야 하겠군요..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자존의 절대자가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인생을 만드시기를 기뻐하셨고 또한 구속하심에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은 절대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인 판단의 여지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상당한 의미와 실제를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자존의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는 것과 그 실제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크신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주관적인 입장에서 누구보다도 더 아름답고 그 사랑이 무한하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무한적인 개념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상대적인 무한적 개념이기 때문에 절대 하나님의 무한과 비교되어질 수 있고 상관성이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할머니의 죽음에서 비롯되어진 선의 상대적 차이라고 하는 개념에서의 죄악 문제는 중세적으로 부터 그리고 구교로부터 어거스틴의 사상적 입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거스틴은 죄라고 하는 것을 선의 결핍이라는 견해를 지지해왔습니다.
그러한 것은 구교에서 언급되어질 수 있고 그러한 기반에서 논해질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개신교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미종족의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을 알 수 없었던 사람들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경시되어지는 상대적 모순이라는 것에 상대적 답변이라고 하는 것의 완전성 상대적 충족성이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절대 자존의 정당함에 따른 구속이라고 하는 것이 평가되어지거나 또는 의문시되어지는 가운데서 새롭게 규정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무한이라는 개념에 정적인 의미로 정당함을 부여할 수 있다는 그러한 판단에서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가운데서는 결코 답변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른 것으로서의 구원이라고 함을 믿을 때에는 상대적 완전의 합리성의 구축여부에 이미 실제적인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적 합리성의 추구요구 자체가 이미 기각되어진 인식과 발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연옥의 소망에 대하여서..
이러한 자존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없고 여호와 하나님의 실재론적 입장에서의 정당함을 찾지 않는 구교적인 입장에서는 상대적 합리성의 추구라는 개념에 어느정도 답변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연옥이라고 하는 개념을 성경에서 찾아낸 것으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합리성에 대한 것은 여기서 전부 논한다는 개념은 적절하지 않고 메일로나 또는 저의 까페에서 아니면 여기 까페에서 달리 논의가 되어지면 그 때에 다시 재고할 수 있는 것으로 받음이 좋겠다고 생각이 됩니다.
다윗의 경우..
다윗도 자신의 아들이 죽음을 놓고 이미 죽은줄 모르고 행하는 가운데서 참으로 그의 고통이 심하였지만 그의 아들이 죽었음을 알고 그의 금식하던 자리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것과 같이 이제는 주님의 뜻하심 안에서 상대적인 이해의 충족성이라고 함의 실제를 말하지 않는 자리에 선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가운데서 다시 주의 뜻하심에 맡기고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의 회복이 있으시기를 축복하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 목사님들의 견해는 그 신학과 정체성에서 이미 답변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고 그러한 답변과는 달리 개인적인 입장이면서도 하나님의 절대 보편에 따른 합당함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증거의 한 표현으로써 이글을 남깁니다.
http://geocities.com/vossc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