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 신천지가 한국의 기성교단에게 묻겠다 1, 2
답변에 있어서
우리가 마음에 두게 되는 것은 '그 질문이라는 것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질문이 성립되지 않는 가운데서 답변이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답변의 유무로만 자기 만족을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질문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서로의 인식의 타당성이 있는 가운데서 그 질문과 그에 다른 답변의 존재와 그 가치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대화나 질문과 답변을 의식한 가운데서는 서로 공통적으로 전제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는 것이 또는 표현한 가운데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물론 성경과 신학이나 아니면 생각의 입장이 많이 전제되어진다는 것 뿐 아니라 대화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입장차이를 확인하는 가운데서 대화를 하는 것이 즉 질문과 답변이라는 것이 제대로 되어질 것으로 보인다. 답변을 위한 수행적 모순이면서도 글로 답변을 표현한다.
그렇기에 먼저 신천지의 입장에 대한 것을 전반적인 측면에서 다른 비판적 입장을 말한다면
첫째로 너무 단순하다는 것이다.
원래 단순한 것이 아주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지만 '단순하다'는 개념이 분별력이 갖춰지지 않은 것의 범주로 넘어갈 수 있다면 답변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판단을 함에 있어서는 당위성을 가질 수도 있다고 보여진다. 답변의 당위성도 사라질 수 있다.
인간의 말로 가르친다고 비판하면서도, 자기들은 그런 입장을 취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즉 9면에 나타나고 있는 소위 '육하원칙'이 그것이다.1)
그리고 무료로 가르친다고 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성경을 인용한다고 해도 잘 인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본문에서는 일하는 자의 받을 보수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을 가르친다고 함에 있어서 복음은 무료라는 개념으로 가르쳐질 수가 없는 것이다. 복음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 때 그것에 걸맞는 돈에 대한 시비가 되는 것이지 교육비라는 개념과 복음이라는 것의 비용과 무분별하게 비교하고 실천한다는 것이 그 단순함에서 지나치는 것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2)
둘째로 성경 인용이 임의적이다.
자기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성경본문을 인용하고 있는데, 성경의 본문의 문맥이나 전반적인 고려는 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인용하는 것으로 빈축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진부한 표현일 수 있을 정도로 일반적이다. 즉 무료라는 개념이 예수님이 거저주라고 하심이란 말씀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일하는 자에 대한 수고를 알아주고 그 비용을 받는 것에 대한 다른 본문은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것이 그런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 말씀이 다른 말씀보다 더 영감이 있다는 부분 영감설이나,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다는 사회적 개념이나 한 부분을 의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온기독교센터에서의 교육함에 육하원칙의 교수법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그런 신학적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전제되어지는 것이니 어떤 기준이라면 임의적이고 필요에 따른 개념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란 생각이 강요된다.3)
셋째로 신학적 배경이 없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신학교에서 육하원칙이란 세상적 학문의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는 정도로 성경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면 성경을 맹목적으로 내세우는 것도 민망할 수준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영감의 개념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개념도 바르게 말하지 못하고,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단편적 논리4)에 매우 선적인 확실성이 정당한 것과 같이 포장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에 즈음해서
신문 1면에 나오는 구호들 '기성 교단 소속 신앙인들아! 거기서 나오라', '신천지가 한국의 기성교단에게 묻겠다'라는 말들은 어떤 논지는 없고 그냥 구호에 그치는 앞서 지적한 자기 주장에서 성토하는 글들 뿐이고 '모순된 자본주의적 개념의 단면'을 기독교에 적용해서 묘사한 그림, 전혀 달란트 재능 섬김에 대한 개념 없는 우화를 가지고 소리치고 있다.
말을 시작 전에 언급한 것과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그 영감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 인용을 통해 자기 주장을 말하기만 하는 자가 질문하는 것이 성립이 될 수 없는 것인데, 답변하지 않으면 득세한 것처럼 자위하는 사람들 이미 그것에 대한 답변이 나와 있는데도 경솔히 말할 수 있는 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말하는 이들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대 원시적 논리의 확실성이 빗어낸 하나의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종말의 개념도 상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개념도 엉망이고, 참되다고 하는 임의적 한 사람을 통해 배타적으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모습들, 전형적인 이단의 한 모습을 본다. 이것이 그들의 말에 대한 답변을 위한 하나의 답변으로 내놓는다.
아직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성경의 영감에 대해서 잘 모르는, 합리성이라는 개념이 단순 논리에서 비롯되어질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젊은이들을 미혹하는 것은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닌 것이다. 더욱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들의 기득권밖에는 다른 이유를 가지지 못하는 가운데서 임의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주께서 판단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펜을 놓는다.
각주1) 마르흐레이트 데 헤이르,철학이 된 엉뚱한 생각들, 김기철 옮김 안광복 감수, 원더박스 2014, p. 22.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 영국의 작가이자 시인, 나에게는 여섯 명의 정직한 하인이있다네(내가 아는 것은 모두 그들에게 배웠다네) 그들의 이름은 무엇, 왜, 언제, 어떻게, 어디서 그리고 누구라네, 이 시는 인간의 분석 능력에 대해 읊고 있음, 인간은 구체적인 정보를 모를 때는 이 여섯 가지 물음들을 이용하지
언급된 신천지 신문과 주요 저서에서는 육하원칙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 시온기독교선교센터에서는 이 모든 것을 육하원칙으로 밝히 알려주고 있고, 신천지 성도는 지극히 작은 자도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2014 여름호 VOL 제15호 발행일 2014년 7월7일'의 9면
'우리 시온기독교선교센터에서는 이 모든 것을 육하원칙으로 밝히 알려주고 있고, 신천지 성도는 지극히 작은 자도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2014 여름호 VOL 제15호 발행일 2014년 7월7일'의 9면
증거장막 성전은‘증거장막’이라는 이름 그대로 계시록의 실상을 성경과 함께 육하원칙으로 증거하는 곳이다.” <요한계시록의 실상> p. 331. 이필찬, 신천지 요한계시록 해석 해부하기 동영상 강의 27강 중, 자료 재인용
각주2) 무료라는 개념이 성경적이라는 말에 있어서는 너무 단순하다는 개념을 지나 생각의 결핍을 말할 있다고 하겠다. 아주 선동적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런 슬로건에 앞서 자본 이해와 자본주의 또는 사회적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거나 또는 배타적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다. 마치 자본주의 비판을 하는 마르크스의 자본 이해와 비슷한 타도적 개념으로 읽게 되어지는 경향도 지식층이나 마음이 상한 자들의 편들기에 편승하고자 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쉽게 표현하면 가진 자를 타도하고 다 나눠줘라는 공산주의, 성경은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달란트 비유가 회폐이면서도 재능이라고 함을 말할 때에 그 재능에 대하여서 그 일함에 대하여서 알아주고 더 잘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으로서 자본주의적 사회 인식과 비교된다. 모순이 있는 현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서 '수정자본주의적 경향'이 있지만 더 바르게 수정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본주의체제적 개념에 비교되어지는 것처럼 섬김과 또한 알아주고 배려하고 존중하는 개념을 상품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마르크스적 발상과 연결되어진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재능을 다 발휘하도록 돕고 알아주고 섬기는 모습은 사회적 개념이나 통념과 약한자 편들기적 개념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현실적 개념에서 혹 개개의 그런 부패된 모습이 있다고 하여서 그것이 전체인 것과 같이 확대해석하여 표현하는 것은 당위성을 얻을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각주3) '이필찬 교수의 선친지의 요한계시록 해부하기' 동영상 강의 에서
이필찬 교수도 신천지의 성경 인용에 대해서 아주 쉽게 편하게 인용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에서 말씀이라는 개념도 임의적으로 적용하고 있고 세상을 심판한다는 것보다도 기성교회 심판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각주4) 단편적 논리를 언급함에 있어서 첫째로 성경의 영감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성경 본문의 글자적 연관성에 또 상황적 해석 가능성에 있어서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적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성경임을 기억할 때에 그냥 불러주는 개념 들려주는 보여주는 개념이 아니라 유기적 영감되었음을 기억할 때에 사도 요한이 가지고 있었던 그 묵시문학적 개념의 사상들도 고려되어지는 가운데 그 계시를 깨달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필찬 교수는 이러한 점에 대하여서 언급하면서 스가랴서의 네 말에 대한 것과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심판을 알리는 말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잘못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둘째로 영감되었음에 대한 개념 뿐 아니라 종말의 개념도 성경적이지 않다. 종말을 상식적인 측면에 뒤에 나오는 시간적 개념으로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초림과 다시 오심의 교회 시대를 종말로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말의 시점적 개념은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은 사도행전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 종말의 때는 교회 시대라고 함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로 이필찬 교수의 지적을 소개하면, 대언자, 참 목자라는 지칭은 이만희씨를 말하고 있는데, 영체로 마지막에 그(이만희 씨)에게 임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 외에 예수님의 임함은 다른 곳에는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만희씨 소속 외에는 예언의 말씀이 있을 수 없고 다 인간의 말을 하고 있다는 식의 이분적 개념을 취하고 있다. 이것이 신천지의 역동성과 기존교회를 증오하게 만들기도 하고 아주 불쌍하게 생각하게 만들 수 있는 기만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의 앞서 이교수는 신천지가 요한 계시록을 주장하고 이만희씨를 말하게 되는 것으로 예수님이 지상에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마지막에 사도 요한이 계시를 보고 요한 계시록을 썼다. 그래서 사도 요한격의 사람이 있을 것인데 후대에 이만희씨가 그런 입장을 취한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보혜사, 이만희의 저서로 알려진 '요한계시록의 실상'이라는 책을 분석하면서 이필찬 교수가 지적한 바인데, 그 내용적 입장에 대하서 판단하건데 예수님은 마지막에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셨는데, '암행어사식'으로 먼저 왔다는 식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개체에게 임한다는 개념도 잘못된 것이다.
아마도 이것을 위해 그들은 삼위일체를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삼위일체를 부인함으로써 이만희씨의 입지가 곤고해지기 때문이다.
단편적이란 말은 아주 선적인 연관성과 귀결성을 말하고 있으면서 합리성의 매듭은 쉽게, 고민함이 없이 어쩜 경솔하게 비유적 개념으로나 임의적으로 넘어가는 가운데서 아주 시각적으로 논리적 모습이 있기 때문에 논리에 대하여서 잘 모르는 사람은 굉장이 논리적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일관성의 확보가 잘 되어 있다. 그렇지만 정당성의 문제는 고려하지 않은 합리성인 것이다. 정당하지 못하게 속이는 자의 말도 일관성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정당성의 확보로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합리성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 둔다.
참고
1. 오늘 밖에 볼 일이 있어 나갔는데 신문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형태의 '종이 뭉치'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냥 버릴까 하다가 예의상 읽어주고 또 질문하기에 답변해주는 것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2. 그 '종이 뭉치'에는 '2014 여름호 VOL 제15호 발행일 2014년 7월7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면과 5면에 기록되어진 질문들을 중심으로 언급한 내용들을 몇가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 이필찬 교수의 신천지 요한계시록 해부하기 강의를 추천하는 바 입니다. 비단 신천지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의 한 형태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3. 이필찬 교수의 신천지 요한계시록 해부하기 강의를 추천하는 바 입니다. 비단 신천지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의 한 형태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