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의 윤리적 문제 극복과 영혼의 향방..
고민상담
낙태 살인
병원에 있으면 별별 일이 다 많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 얼굴이 두꺼워지는 걸 느낄 수 있다. 가방을 들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떼지어 병원으로 들어오는 고등학생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 아이들은 수술하러 들어가는 아이를 무슨 환송 식 하듯 뒤에서 재잘거린다. “잘하고 와, 별거아냐” 뭐 그런 말을 한다. 그리고는 수술이 끝나고 나면 간단한 주사라도 한방 맞고 나온 것처럼 대단찮게 여기며 “아팠니? 밥이나 먹으러 가자” 어쩌구 하면서 수선을 떤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분명히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병원에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불안해진다
제가 이중에 한사람 입니다 이렇게된 영혼은 어디로 가게되는지요? 하나님과 화목해지는 방법은 어떻게해야 돼나요 3개월 전과 3개월 이후의 낙태는 신앙적으로 봤을때 다를수도 있나요 많이 망설이고 고민하다가 상담 드려요 귀한 답변을 기다립니다
답변
낙태의 윤리적 문제 극복과 영혼의 향방..
말씀하신 분은 낙태라는 개념에서 그 비윤리성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그 옳고 그름을 놓고 고민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낙태라고 함과 자연유산이라고 함으로 고통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에서 낙태만으로써의 일방적인 분위기라는 개념보다 좀더 더 보편적인 판단이 있어야 할 것같아서 저의 입장을 말씀드리면서 저의 견해를 말씀드릴까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두가지 측면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그 상관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분적 개념이 아니면서.. 구체성이라는 구별적 개념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는 ,'일반적인 측면에서 언급인 낙태에 대한 윤리적 문제 극복'과 그 '영혼의 향방'이라는 것입니다.
1. 낙태의 윤리적 문제 극복에 대하여서..
1)사람들의 성의식의 실재를 분별함의 중요성에 대하여서..
어제 EBS 방송에서 청소년 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청소년의 성관계에 있어서 남자는 그 책임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과 여학생의 문제는 한번이 어렵지 그 다음에는 대수롭지 않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버스를 타고 오는데 어떤 두 여자분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기를 가져야 한다는 언니된 사람의 말에 그 함께한 여자분은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면 부담이 되고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며 나중에 '엄마 나를 왜 이렇게 낳았어' 라고 질문하면 답변못하는 그 고통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남편 되어진 자도 그러한 자녀계획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친 언니가 자녀 갖는 것에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언니되는 사람은 자녀가 있는 것같기도 한데.. 그러한 건전한 생각들이라고 함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들은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운데서 책임이 없는 자의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물론 그 분들이 교회에 다닌다고 하여도 신앙에 대한 실재적 분별에 입각한 신앙의 지도를 받지 못하는 경향 때문에, 무엇이 실재인지 확신할 수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실재인지 확신하지 못한다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가르침과 일상적인 상식의 실재를 따를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저만 즐겁게 생활하게 되어지는 것이지 그 자녀를 낳는다고 하여도 그들을 통한 유익이라고 함, 복이라고 함의 실재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느냐는 사고입니다.
물론 교회에서 하나님에 대한 실재를 가르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하나님의 실재를 증거하고 있고 가르치려고 노력하고 있음에 대한 것에 이미 판단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도,자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서 마음을 두지 않는 것으로 인해서 삶의 실재라는 것을 제대로 분별하는 것을 가르치지 못했던 것으로써의 한 아픔을 봅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그 실재를 생각한다면 자녀의 복을 말씀하심의 실재를 생각하고 그 음란을 벗어나며 가정의 소중함과 성의 기쁨과 성의 소중함이라고 함을 피부적 쾌락으로 바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 안에서 실재적 판단으로 인한 성의 정체성의 실재를 받으며 또한 가정과 성, 그리고 성의 기쁨의 실재를 제대로 분별하도록 우리 성도들은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서 우리의 다음세대에 잘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실재인지 모르는 가운데서 그 당연한 의무감은 사라지고.. 불가지론으로 흐르는데 신앙은 불가지론에서 의지적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말씀하시므로 내가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도 진정한 실재를 받는다는 점을 기억할 때만이 의식의 전환과 그 한 예로서 성의 정체성과 그 소중함과 그 기쁨을 제대로 누리게 되어짐을 말하게 됩니다.
2) 낙태 의료윤리와 기독교 윤리적 개념에 대하여서..
의료사업도 사회적 분류로 구분해본다면 서비스업에 포함되어집니다. 그러한 것이면서 생명과 관련된 것을 생각한다고 할 때에는 그러한 서비스적 개념에서의 회의를 느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바람직 하지 못하다는 그러한 중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수효라는 그러한 것에 의료행위가 강요되어진 가운데서는 의사의 길을 걷는 분들의 그 심정의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것이라는 주관적이면서도 그 깊은 고통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낙태인데..카돌릭에서는 그 낙태라는 것의 개념을 피임까지도 말하게 되어집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영혼에 대한 가르침이 그 선재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질 때에, 즉 '영혼의 선재설'로 이해되어질 때에 그 '정충'의 행함이라고 하는 것도 영혼과의 상관성을 부인할 수 없다는 개념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영혼의 창조설'을 믿습니다. 아이가 잉태되어진 가운데서의 성장적 개념에 영혼을 하나님께서 잉태와 함께 창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임까지 살인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인간이라고 함의 존재를 예정하신 가운데서 일반적으로 태어나도록 섭리하고 있는데 그러한 것을 어떤 의도 즉 마음에 들지 않은 상대라든지 아니면 단지 쾌락으로만 생각한다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입니다.
그 예를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성경에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관계를 맺어서 자손이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것이 싫어서 질외 사정을 하다가 하나님께 죽임이 되었던 것을 주목하면 피임이라는 것이 무분별하게 정당화 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물론 앞서 예를 든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여기서 접기로하고 성경말씀의 인용적 차원에서만 언급합니다. 지면상..)
부부간에 성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면서도 그 합당한 관계, 결혼이라고 함에 있어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되어지는데 때를 따라서 그들에게 자녀의 축복을 주심에 대한 것을 분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하심을 거역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의료 과학적인 측면에서 수정후 얼마라는 그러한 것을 보건당국에서도 잠정적으로 정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만, 그것은 넘 상대적인 임의적 동의안일뿐이고 하나님 앞에서 그 실재를 말할수 있다는 점을 기억할 때에 상대적인 측면의 모호함을 떠나서 앞서 말한 피임이라고 함 자체의 살인 논란을 정형화 하지 않도록하고 주관적이면서도 실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낙태라는 개념을 앞서는 피임에 대한 것을 살펴보았고 말씀하신 분의 견해와 같이 3개월 이전이나 이후의 개념에서 그 낙태라고 함을 어떻게 말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의 문제를 접근해보겠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사람이 죽고 산다'는 그 개념보다 도 실재적인 것이 없다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주관적인 형태의 믿음이면서도 그 실재를 말한다면 그 기준을 존중하면서도 메이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에 하나님께 반역함에 대하여서 그들을 죽이시는 형벌로서 기적을 베푸심에 대한 것에 대하여서 비 윤리적이라고 함을 말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라는 점에서 이해되어지지만 그 정당함은 역시 상대적인 판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절대자로서의 그 행하심을 상대적으로 생각하겠다고 고집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 절대자이심에 대한 증거로서의 그 형벌을 말하게 되어지며 그러한 것을 믿은 자들은 그러한 판단에서 벗어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라고 함을 기억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녀를 기르지 못한다는 그러한 환경적이나 또는 어떤 기득권적인 판단에서 낙태를 행한다면 그것은 항상 정당화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녀라고 함에 내가 그 아이를 성장시키고 잘 키우지 못함에 있어서는 낙태라고 함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그 책임이 그 사람의 가슴에 남아 있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글을 쓰신 분의 중심에는 나의 아기는 어디 있을까.. 내 아기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 그러한 질문이 아마도 그 양심의 고통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러한 죄악도 다 용서하시지만 그러한 죄에 대한 것을 경계하시고 그 대속의 깊이를 잊지 않도록 그 상처를 남겨두시는 경우를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하신 요즘의 낙태경향이라고 하는 것이 좋은 아들녀석이라는 상대적인 우성적 측면에서의 정체성을 가진 자를 가지고 싶다는 그러한 기준으로 일관하고 있고 그것이 검증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때를 기다리다보니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비윤리적 의료행위를 강요하게 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내 아들 내 딸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그 귀함의 실재를 말할수 있고 인간적으로 아무리 꼼보라고 해도 내 자식이기 땜에 귀한 것이라는 그 기준의 실재를 가지는 것이 이러한 비윤리적 의료행위의 낙태의 죄악을 막을 수 있게 되어진다고 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자존이라는 그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으로서의 절대자의 재가가 실재라는 그 판단이 있을 때만이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봅니다.
2. 영혼의 향방에 대하여서..
낙태되어진 아기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일단 이것은 성립되어지지 않는 질문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가능하면서도 정당함을 하나님 앞에서 상실한 것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아이의 영혼은 살아 있는 우리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판단 아래서 온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한 성경의 예를 주목한다면,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가운데서 아이를 잉태하였는데 그 아이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다윗은 금식하면서 참 다른 신하들이 아이가 이미 죽음에 대한 것을 모르고 기도하는 것을 민망해 하는데 그것을 알고 다윗이 아들이 죽었음을 물어 알고, 그 금식에서 벗어나서 옷을 입고 음식을 먹음과 그가 말함에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대려가심에 자신이 주관할 것이 아니라고 함을 말했던 것입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허용되어진 사후의 영혼의 문제에 대한 것은 카돌릭이 말하는 연옥이라는 곳에서의 장소적 개념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다윗의 언급에서 반박되어지는 것임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믿습니다. 즉 그 아이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태어나지 못하였다고 하면 그는 역시 주의 택한 백성의 반열에 세우실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지옥에 존재적 자리매김이 되어질 것입니다.
정적인 측면에서는 그러한 판단이 넘 극적임에 대한 반론이 있을수 있지만 그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의 합리성과 정당함에 따른 합리성은 같이 판단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낙태 살인
병원에 있으면 별별 일이 다 많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 얼굴이 두꺼워지는 걸 느낄 수 있다. 가방을 들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떼지어 병원으로 들어오는 고등학생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 아이들은 수술하러 들어가는 아이를 무슨 환송 식 하듯 뒤에서 재잘거린다. “잘하고 와, 별거아냐” 뭐 그런 말을 한다. 그리고는 수술이 끝나고 나면 간단한 주사라도 한방 맞고 나온 것처럼 대단찮게 여기며 “아팠니? 밥이나 먹으러 가자” 어쩌구 하면서 수선을 떤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분명히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병원에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불안해진다
제가 이중에 한사람 입니다 이렇게된 영혼은 어디로 가게되는지요? 하나님과 화목해지는 방법은 어떻게해야 돼나요 3개월 전과 3개월 이후의 낙태는 신앙적으로 봤을때 다를수도 있나요 많이 망설이고 고민하다가 상담 드려요 귀한 답변을 기다립니다
답변
낙태의 윤리적 문제 극복과 영혼의 향방..
말씀하신 분은 낙태라는 개념에서 그 비윤리성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그 옳고 그름을 놓고 고민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낙태라고 함과 자연유산이라고 함으로 고통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에서 낙태만으로써의 일방적인 분위기라는 개념보다 좀더 더 보편적인 판단이 있어야 할 것같아서 저의 입장을 말씀드리면서 저의 견해를 말씀드릴까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두가지 측면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그 상관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분적 개념이 아니면서.. 구체성이라는 구별적 개념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는 ,'일반적인 측면에서 언급인 낙태에 대한 윤리적 문제 극복'과 그 '영혼의 향방'이라는 것입니다.
1. 낙태의 윤리적 문제 극복에 대하여서..
1)사람들의 성의식의 실재를 분별함의 중요성에 대하여서..
어제 EBS 방송에서 청소년 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청소년의 성관계에 있어서 남자는 그 책임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과 여학생의 문제는 한번이 어렵지 그 다음에는 대수롭지 않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버스를 타고 오는데 어떤 두 여자분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기를 가져야 한다는 언니된 사람의 말에 그 함께한 여자분은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면 부담이 되고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며 나중에 '엄마 나를 왜 이렇게 낳았어' 라고 질문하면 답변못하는 그 고통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남편 되어진 자도 그러한 자녀계획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친 언니가 자녀 갖는 것에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언니되는 사람은 자녀가 있는 것같기도 한데.. 그러한 건전한 생각들이라고 함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들은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운데서 책임이 없는 자의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물론 그 분들이 교회에 다닌다고 하여도 신앙에 대한 실재적 분별에 입각한 신앙의 지도를 받지 못하는 경향 때문에, 무엇이 실재인지 확신할 수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실재인지 확신하지 못한다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가르침과 일상적인 상식의 실재를 따를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저만 즐겁게 생활하게 되어지는 것이지 그 자녀를 낳는다고 하여도 그들을 통한 유익이라고 함, 복이라고 함의 실재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느냐는 사고입니다.
물론 교회에서 하나님에 대한 실재를 가르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하나님의 실재를 증거하고 있고 가르치려고 노력하고 있음에 대한 것에 이미 판단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도,자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서 마음을 두지 않는 것으로 인해서 삶의 실재라는 것을 제대로 분별하는 것을 가르치지 못했던 것으로써의 한 아픔을 봅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그 실재를 생각한다면 자녀의 복을 말씀하심의 실재를 생각하고 그 음란을 벗어나며 가정의 소중함과 성의 기쁨과 성의 소중함이라고 함을 피부적 쾌락으로 바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 안에서 실재적 판단으로 인한 성의 정체성의 실재를 받으며 또한 가정과 성, 그리고 성의 기쁨의 실재를 제대로 분별하도록 우리 성도들은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서 우리의 다음세대에 잘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실재인지 모르는 가운데서 그 당연한 의무감은 사라지고.. 불가지론으로 흐르는데 신앙은 불가지론에서 의지적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말씀하시므로 내가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도 진정한 실재를 받는다는 점을 기억할 때만이 의식의 전환과 그 한 예로서 성의 정체성과 그 소중함과 그 기쁨을 제대로 누리게 되어짐을 말하게 됩니다.
2) 낙태 의료윤리와 기독교 윤리적 개념에 대하여서..
의료사업도 사회적 분류로 구분해본다면 서비스업에 포함되어집니다. 그러한 것이면서 생명과 관련된 것을 생각한다고 할 때에는 그러한 서비스적 개념에서의 회의를 느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바람직 하지 못하다는 그러한 중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수효라는 그러한 것에 의료행위가 강요되어진 가운데서는 의사의 길을 걷는 분들의 그 심정의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것이라는 주관적이면서도 그 깊은 고통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낙태인데..카돌릭에서는 그 낙태라는 것의 개념을 피임까지도 말하게 되어집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영혼에 대한 가르침이 그 선재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질 때에, 즉 '영혼의 선재설'로 이해되어질 때에 그 '정충'의 행함이라고 하는 것도 영혼과의 상관성을 부인할 수 없다는 개념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영혼의 창조설'을 믿습니다. 아이가 잉태되어진 가운데서의 성장적 개념에 영혼을 하나님께서 잉태와 함께 창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임까지 살인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인간이라고 함의 존재를 예정하신 가운데서 일반적으로 태어나도록 섭리하고 있는데 그러한 것을 어떤 의도 즉 마음에 들지 않은 상대라든지 아니면 단지 쾌락으로만 생각한다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입니다.
그 예를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성경에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관계를 맺어서 자손이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것이 싫어서 질외 사정을 하다가 하나님께 죽임이 되었던 것을 주목하면 피임이라는 것이 무분별하게 정당화 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물론 앞서 예를 든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여기서 접기로하고 성경말씀의 인용적 차원에서만 언급합니다. 지면상..)
부부간에 성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면서도 그 합당한 관계, 결혼이라고 함에 있어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되어지는데 때를 따라서 그들에게 자녀의 축복을 주심에 대한 것을 분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하심을 거역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의료 과학적인 측면에서 수정후 얼마라는 그러한 것을 보건당국에서도 잠정적으로 정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만, 그것은 넘 상대적인 임의적 동의안일뿐이고 하나님 앞에서 그 실재를 말할수 있다는 점을 기억할 때에 상대적인 측면의 모호함을 떠나서 앞서 말한 피임이라고 함 자체의 살인 논란을 정형화 하지 않도록하고 주관적이면서도 실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낙태라는 개념을 앞서는 피임에 대한 것을 살펴보았고 말씀하신 분의 견해와 같이 3개월 이전이나 이후의 개념에서 그 낙태라고 함을 어떻게 말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의 문제를 접근해보겠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사람이 죽고 산다'는 그 개념보다 도 실재적인 것이 없다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주관적인 형태의 믿음이면서도 그 실재를 말한다면 그 기준을 존중하면서도 메이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에 하나님께 반역함에 대하여서 그들을 죽이시는 형벌로서 기적을 베푸심에 대한 것에 대하여서 비 윤리적이라고 함을 말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라는 점에서 이해되어지지만 그 정당함은 역시 상대적인 판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절대자로서의 그 행하심을 상대적으로 생각하겠다고 고집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 절대자이심에 대한 증거로서의 그 형벌을 말하게 되어지며 그러한 것을 믿은 자들은 그러한 판단에서 벗어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라고 함을 기억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녀를 기르지 못한다는 그러한 환경적이나 또는 어떤 기득권적인 판단에서 낙태를 행한다면 그것은 항상 정당화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녀라고 함에 내가 그 아이를 성장시키고 잘 키우지 못함에 있어서는 낙태라고 함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그 책임이 그 사람의 가슴에 남아 있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글을 쓰신 분의 중심에는 나의 아기는 어디 있을까.. 내 아기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 그러한 질문이 아마도 그 양심의 고통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러한 죄악도 다 용서하시지만 그러한 죄에 대한 것을 경계하시고 그 대속의 깊이를 잊지 않도록 그 상처를 남겨두시는 경우를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하신 요즘의 낙태경향이라고 하는 것이 좋은 아들녀석이라는 상대적인 우성적 측면에서의 정체성을 가진 자를 가지고 싶다는 그러한 기준으로 일관하고 있고 그것이 검증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때를 기다리다보니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비윤리적 의료행위를 강요하게 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내 아들 내 딸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그 귀함의 실재를 말할수 있고 인간적으로 아무리 꼼보라고 해도 내 자식이기 땜에 귀한 것이라는 그 기준의 실재를 가지는 것이 이러한 비윤리적 의료행위의 낙태의 죄악을 막을 수 있게 되어진다고 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자존이라는 그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으로서의 절대자의 재가가 실재라는 그 판단이 있을 때만이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봅니다.
2. 영혼의 향방에 대하여서..
낙태되어진 아기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일단 이것은 성립되어지지 않는 질문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가능하면서도 정당함을 하나님 앞에서 상실한 것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아이의 영혼은 살아 있는 우리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판단 아래서 온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한 성경의 예를 주목한다면,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가운데서 아이를 잉태하였는데 그 아이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다윗은 금식하면서 참 다른 신하들이 아이가 이미 죽음에 대한 것을 모르고 기도하는 것을 민망해 하는데 그것을 알고 다윗이 아들이 죽었음을 물어 알고, 그 금식에서 벗어나서 옷을 입고 음식을 먹음과 그가 말함에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대려가심에 자신이 주관할 것이 아니라고 함을 말했던 것입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허용되어진 사후의 영혼의 문제에 대한 것은 카돌릭이 말하는 연옥이라는 곳에서의 장소적 개념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다윗의 언급에서 반박되어지는 것임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믿습니다. 즉 그 아이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태어나지 못하였다고 하면 그는 역시 주의 택한 백성의 반열에 세우실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지옥에 존재적 자리매김이 되어질 것입니다.
정적인 측면에서는 그러한 판단이 넘 극적임에 대한 반론이 있을수 있지만 그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의 합리성과 정당함에 따른 합리성은 같이 판단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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