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swers

수요일, 7월 05, 2006

트랜스젠더(transgender) - 동성애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트랜스젠더 - 동성애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서론에 있어서

세상에는 이해되어질 수 있어도 납득되어질 수 없는 일도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상식적인 입장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상식이라고 하는 것이 시대적 해석에서 다시 재고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있으나 그러한 그러한 여지라고 하는 것 자체도 여전히 의문시 되어지기 때문에 어떤 획일적인 납득 당위성을 특수적 상황의 편린적 입장으로 인식의 당위성을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트랜스젠더, 동성애자들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인간으로서는 이해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있습니다. 물론 이해와 용납의 당위성이 항상 같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성에 대한 시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주관적인 성 호르몬 분비에 따른 자신의 의지적 선택의 범위를 넘어서는 가운데서의 그 고통은 글쓰는 본인도 알 수 없는 너무나 큰 고통이 되어질 수 있다고 함에 있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하여도 이해하려는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인간으로서의 성에 대한 인식과 느낌과 생활에 대하여서 다르다는 것에 대하여서 어떤 대안이나 합의되어질 수 있는 기준을 찾아서 규정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에 있어서도 그 기준 자체적 존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찾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 기준은 없어서 임의적으로 말해도 된다는 것은 인권이라는 보편적 입장으로 정당화 되어질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찾을 수 없다고 하여도 존재하는 것이 많이 있고 이성적 확인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도 그 실존과 실존이해는 납득되어지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트랜스젠더의 입장도 바로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정체성의 시비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입장으로써, 이미 획득되어지고자 하는 것의 기득권적 인권의 보편성으로써, 정체성의 정당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입장의 당위성으로 다른 사람들의 인식적 보편성에 상당한 어려움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딜레마에서도 분명한 시비는 가려진다고 함을 먼저 말씀드리면서 동성애자들의 신앙적 정당함에 대한 주장에 대한 시비에 대하여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인권이라고 하는 것의 보편성은 모두 존중되어져야 하고 그것의 존중이 진정한 사회에서의 행복추구권으로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인권의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도 상대적인 보편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인권이라는 보편성과 비교할 때에 소수라는 특정인들의 당위성을 피해의식적인 측면에서라도 세우고자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동정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정당함은 재고되어야 하는 보편성으로서 자리매김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더욱 자존자로서의 신의 자존적 절대보편이라고 하는 속성은 앞서 말씀드린 인권이라는 상대적 보편이라고 하는 것으로 비로소 합리화되어지거나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기억할 때에 한정되어질 수 밖에 없고 그 가운데서 고통은 있으나 그 선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 성전환이라는 행위로 인한 경험의 사실이 정당화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합당한 것은 본래의 성으로 회복하고 그 고통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음이 옳은 것입니다.

트랜스젠더 입장에서의 정체성에 대한 변명에 대한 언급에 대하여서 인용과 답변의 글을 쓰고 결론적인 측면에서 전반적인 언급을 하도록하고 결론후에 재기되어질 수 있는 질문과 답변의 말을 꼬리말 형식으로 언급해두도록 하겠습니다.

본론에 즈음해서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라는 점에 대하여서..
인용

"2004년 6월 18일과 19일 양일에 걸쳐 '성적 소수자'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성격의 행사가 열려 큰 관심을 끌었다.한기연(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에서 주최하고 재미 신학자 현경 교수가 강연에 나선 '강요된 침묵, 기독교 안의 동성애 - 입을 떼다' 행사와 5회 째를 맞은 '모두를 위한 자유와 평등 - 2004 퀴어(queer)문화 축제'의 '퍼레이드 2004'가 그것.

특히 두 행사엔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가해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에 대한 편견'이 많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답글

포스트모던적 개념에서 주목하면 특히 니체를 비롯해 그를 추종하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현대의 보편적인 구조라고 하는 것을 깨는 것이 행복을 위한 인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사실 현실적인 개념을 이상적인 개념으로 일관할 수 없다는 그러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음을 기억하게 되는데 (각주1), 이것은 다수 또는 보편의 폭력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각주2) 그것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인권이라고 함도 보편적인 것은 사실이며 존중되어져야 하지만 상대적인 보편이라는 점에서는 상대적인 관계적 한정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과 그것에 따른 윤리적 판단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미 신학교수 현경교수님의 동성애 옹호적 발언에 대하여서 답변

현경교수님의 입장 인용 1.

"현경 교수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예수가 두벌 옷도 갖지 말라'고 했는데 전세계 모든 교회의 어떤 사람도 이를 지키지 못하고 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눠주라는 성경 말씀을 누가 지키고 있는가"라며 "만약 이런 걸 다 지키고 있다면 기독교인은 모두 '사회주의자'가 돼 있어야 할 것"이라고 성경 구절 가운데 동성애에 대한 것만 따라야 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임을 설명했다.

그는 또 "성경을 해석하는 권한이 지금까지 목사와 신학자에게만 있었지만 이젠 여러분에게 있다"며 "기독교의 가장 중심 메시지인 사랑과 정의와 자유라는 큰 틀 안에서 동성애, 이성애, 양성애 그 모든 것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말씀이 '환난이나 고난이나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구절인데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트렌스젠더나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큰 호응을 얻었다.

이번 행사 뒤, 발제를 맡은 김윤성 연구위원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는 것은 적어도 이젠 '동성애' 문제가 '그들만의 문제'를 넘어 모두 함께 고민하고 있다는 것 같다고 느꼈다"며 "이젠 단순히 기독교를 넘어 우리 사회의 중요한 부분인 다른 종교에까지 논의가 이뤄졌으면 한다"고 밝혔다.

참가자 이호준(20, 대학생)씨는 "평소 동성애 문제를 새롭게 봐야 한다고 생각해왔는데 현경 교수님 등의 강연을 통해 이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다"며 행사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답변 1.

현경교수님의 입장은 상당히 인위적인 편의주의적인 합리성을 따르고 있다 즉 일관성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의 부당성과 또한 전반적인 사랑과 같은 큰틀 즉 보편적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셨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해석의 문자적 해석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영적인 해석을 함이 옳은 것인가는 임의적으로 설정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위한 실재론적 기반이 있어야하는데 그것에 대하여서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이것은 이후에 반론이 있다면 받을 수있음을 밝혀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보편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문자적 해석을 한다고 할 때에 하나님의 절대 보편적 입장은 재고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서는 신학교수로서의 기본적인 실수라고 함을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절대라는 개념의 상대성을 말할 수 있겠지만 이것도 이후에 지적되어질 수 있는데 그 실재론을 거론할 수 있는 것은 그냥 맹목적인 사랑이라는 보편에서의 실재론을 찾은 것으로 볼 때에 이미 그러한 논의되어질 수 있는 실재론은 마음에 두지 않은 것으로 본다.

더욱 문자적개념과 같은 개체에 대한 해석을 달리 해야한다고하는 가운데서의 사랑과 같은 보편적 입장에서 접근을 말한다면 인권이라는 보편이라고 함이 많은 사람들의 인권이라는 보편과 상관관계에서 한정되어진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권의 주장에 있어서 소수라는 개념을 정당화하기에는 보편적 입장을 주장하기에는 너무 모순적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소수를 위해 보편을 말하고 있으면서 정작 상대적 보편들의 관계성이라고 하는 것의 보편과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보편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두지 않음은 여전히 임의적인 합리성의 전환밖에 되지 않는다.


현경교수님의 입장 인용 2.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내용도 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말씀이 '환난이나 고난이나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구절인데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트렌스젠더나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답변 2.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들이 사랑에 거할 수 있음을 인정하심에 대하여서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에 대하여서는 고치고자 하는 중심이 있지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연약함은 이해되어질 수 있어도 연약함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에 대한 계속적인 지속상태를 정당화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 고통가운데서도 원래의 성의 정체성을 되찾고 그 가운데서 비록 주의 뜻은 이해하지 못해도 그 고통가운데서 선하심을 말씀하실 수 있음과 그것의 정당함이 자존적으로 재가되어진 것임을 기억할 때에는 순종하는 중심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볼 때에 남성이 아닌 여성 또는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 판단되어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이라면 그것이 나의 본래의 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자존의 절대자의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그 고통의 사실 속에서도 타고난 본래의 성을 찾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평안함과 성의 기쁨이라는 나르시즘적인 자기 정체성의 사실보다도 자존의 절대자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 자신의 상대적인 모습속에서도 정당한 사실로 나타난다는 것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 옳은 것입니다.

같은 인간으로서는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없고 존중한다는 점에서의 표현으로써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못됨을 인정하나 하나님 앞에서의 그 증거로서는 분명하게 타고난 본래의 성을 지니고 되찾는 것이 옳은 것이며 그 고통속에서도 선하심의 사실을 기쁘게 받을 수 있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출판물에 대한 답변

1.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 신이 허락하고 인간이 금지한 사랑

답변 1

이미 동성에 대하여서 가증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바에 대하여서 여러가지 역사적 정황이라고 하는 것으로 비판하기에는 역부족하다는 것과 역사적 비평학적 접근을 했다고 했는데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Fact)이라는 것이 진정한 사실이냐는 것에 대하여서 여전히 회의적이라는 점에 대하여서 분명한 답변이 있는 가운데서 이야기 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역사적 예수라는 고증학적인 측면에서의 예수에 대한 재구성이라고 하는 것이 실패하였음은 역사적 사실이었음에 대한 것은 정설로 알려지고 있으며 역사비평학의 종말이라는 그러한 이론들도 나오고 있는 반면에 얼마나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하여서 답변되어질 수 없는 것임을 자초한 입장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이 동성애자들을 자살에서 막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의문시되어질 수도 있다. 그것은 사실에 대한 개념이 임의적이기 때문에 한시적인 생각이요 그것이 지나면 더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킬 수도 있다는 점이다. 참된 대안은 그러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합리성의 매료성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나르시즘적인 관점의 전환에서 자기 사랑의 사실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참된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이 우리의 삶의 상대적인 이해할 수 없는 가운데서도 합당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에 있음을 말할수 있습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동성애자들이 볼 때에 그들에 대한 편견이라는 것을 글을 쓰는 본인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 편견이라고 하는 것이 배척되어야 하는 당위성에서 비롯되어진 것이 아닌 상식이 기본되어진 생각의 여지로써 그리고 참다운 사실로써 말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신학과 철학에서는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하여서 불가지론적 개념을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합리성에서 정당성이 취하여진다는 개념으로써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의 부여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악한 세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인식에서 비롯되어지는 포스트모던적 개념에서의 탈 구조적 탈 보편적 입장을 말하기 위해 보편의 폭력이라는 것을 거론하며 소수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의파의 학설이 나서고 있는데 사실 정의라는 것의 정체성이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임의적 판단의 보편이해라고 하면 그 소수에게마저 폭력을 가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잔혹성을 가하게 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같은 인간으로서의 동성애자들과 트랜스젠더들의 고통과 고민과 그 어려움을 어떻게 다 이해하지 못하고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하는 것을 동의적 차원에서 규정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선하심은 우리인생의 고통이라고 하는 현상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전환적 개념에서의 정체성의 유혹을 벗어나서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뜻하심안에서 사실을 찾는 가운데서 더 큰 일들을 해내시는 참된 성도들로서 일반인들로서 삶의 의미의 기쁨이 있으시기를 위하여 기도하며 글을 맺습니다.












각주1) 안성찬, 이성과 감성, 유로서적
저자는 독일철학적 입장에 대한 사상에 대한 견해를 전반적으로 기술하고 포스트모던이즘적 개념의 탈구조주의적 개념에 대한 현실적인 비판을 하고 있는데 그의 본서 마지막 부분 '비판'이라는 부분을 주목할 수 있다.

이글을 쓰는 본인으로서는, 저자의 아펠의 철학의 변형과 그에 따른 수행적 모순을 벗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니체의 가상성과 그에 따라 생성되어진 보편에 저항하는 헤체라고 하는 것의 파괴성이라고 하는 것을 한정을 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변형되어진 하나의 한정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일뿐이며, 본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자존의 절대의 보편적 정당함에 따른 재가있는 판단적 사실이 비로소 수행적 모순이라는 판단과 다르면서도 비판의 여지를 가진 가운데서도 진정한 사실로 말하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2) 이러한 인권이라는 상대적으로 인정의 당위성을 가진 보편성의 개념에서의 주장의 전환적 모색을 행한다는 것은 한편 수긍되어지나 더 많은 사람들의 보편적 인권이라고 하는 것은 재고되어질 수 있어야 자신의 보편적 인권이라고 하는 것도 자리매김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보편의 폭력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주관적 보편으로 상대적인 보편에 대한 재고로써 전반적인 상대적인 생각의 보편성은 그 말하는 주관적 보편이 한정되어질 필요성이 있다는 것에 더욱 합리적인 판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신적인 재가라는 개념의 절대보편적 정당함을 얻는다면 그것은 앞서 말한 것에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게 되지만 그러나 트랜스젠더와 동성이라는 개념은 절대의 보편적 재가와는 상관성을 말할 수도 없고 재가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의 생각에서는 동정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지만 그 존재적 정당함에 대한 행보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꼬리말

대법원 판결에 대한 개인적인 입장

성전환에 대한 법률적 허용과 그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보조적인 가이드라인을 엄격하게 만든다고 하고 있는데 그것은 옳지 못하다고 본다. 법을 신설함에 있어서 법의 심리에 있어서 이미 인권의 보편성에 대한 재고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개정되어야 할 법이라고 본다

그러면서도 준비되어진 가운데서의 법적 입장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엄격한 기준이라는 데드라인을 만들기 보다는 정규법적인 제도로서의 우선적인 법적 조항보다는 한 판례나 어떤 규례정도로 법적 최소한의 실효의 당위성을 세우는 것이 최선이라고 본다. 그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인권이라고 함이 소수의 개념도 존중하지만 일반인들의 다수의 행복권과의 상관성에서 규정되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는 법적인 조항의 신설이 중요하다고 본다.

기성세대의 소수적 입장을 존중한다고 다음 세대의 성인식의 혼란이라고 하는 것을 무시할 수 있는 조항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함의 한 예만 들어둔다.

그 혼란이라는 것은 분별력이 없는 자들의 임의적인 호기심적인 개념과 절제하지 못하는 욕망적 개념이 어떤 당위성이 있는 법적 정당함을 임의적으로 합당하지 못하게 빌려올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서 법조계는 사회적으로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그 오고 오는 우리 후손들의 인식의 일반정체성에 임의적 고통을 부른 것에 대한 보편적 당위성을 기억하지 못함에 대하여서 다시 계속해서 판단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몇대의 신앙의 가정과 신앙생활을 한 성도로서의 동성애적 입장과 트랜스젠더의 입장을 취하시는 분에게

신앙에 있어서 그 연륜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귀하고 큰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비로소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자존의 절대자의 그 정당한 말씀이 상대적인 형식의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해서 상대적인 측면의 어떤 정도의 당위성을 가지고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트랜스젠더는 질병이다라는 견해에 대하여서

몸의 이상이 있다는 것이 항상 질병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며 현실적으로도 아무리 건강에 자부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여도 진료를 받으면 어느 정도는 이상으로 진단을 받을 수 있다고 볼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트랜스젠더적인 개념의 어떤 의미와 인식을 느낀다고 하는 것이 꼭 질병으로 규정하고 그것에 대한 대안을 생물학적으로 만족(?)시키는 방향을 추구하거나 권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트랜스젠더적인 행보를 생각하시는 분에게

몸의 성장으로서의 이상적 입장이 간혹 사람마다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사춘기에 호르몬 분비는 개인적인 차이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시적일 수도 있는 그러한 것을 단정지어서 성급한 동성애자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며 적극적인 상담과 노력을 친지를 비롯한 주위 사람과 힘써서 극복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리고 트랜스젠더로서의 임의적이고 개인적으로써의 기쁨도 있지만 호르몬 조절을 위한 의료행위적 입장을 항상 염두에 둔다는 것과 지금까지의 생활의 여러가지 정황에서 있게 되어지는 기득권에 대한 극복은 그렇게 기쁨만으로 이야기 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동성애적인 그러한 기쁨을 만족하기 위해 고통도 같이 재고해야 한다는 것과 그에 비해서는 동성애적인 것을 극복하기 위한 고통도 있고 또 보람도 말할 수 있는 것을 기억할 때에 임의적인 단순한 선택은 지향하는 것이 옳은 것이며, 그리고 상식적인 면에서도 추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런 트랜스젠더적인 행보는 하나님앞에서 분명 잘못입니다.

트랜스젠더는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가에 대하여서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으로 그러한 경향과 그러한 모습을 버리고 본래의 타고난 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지니고 되찾는 중심과 그러한 삶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가운데서 고통이 있더라도 옳다는 중심과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서 지속적인 신앙생활과 교회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좀더 토론을 원하시는 분

저의 홈페이지에서 카페로 오셔서 대화하실 수 있습니다.



http://geocities.com/vosscare



Free Counters